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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백]항아리 속에 장이 익어가던 집

 

 

 

 

 

계절은 어느새 만추에 접어들었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 아래 야트막한 흙돌담을 걷는다. 그리고 흙돌담 너머 저만치 장독대가 보인다. 나란히 줄 세워 앉혀 놓은 항아리마다 시간이 익어간다. 뜨락에 항아리가 놓인 것을 보면 왜 그런지 마음이 고향 집에 있는 듯하다. 어릴 적에 보았던 어머니의 장독대는 뒤란에 있었다. 큰 배불뚝이 소금 항아리에서부터 조그맣고 예쁜 항아리까지 반질반질했다, 얼마나 닦고 관리를 잘했으면 그토록 윤기가 났는지 항상 정갈한 장독대였다.

가을에 콩을 수확해 타작을 하고, 가마솥에 콩이 뭉근하게 익도록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익은 콩을 꺼내 큰 절구에 찧어 메주를 만들고 집안에서 냄새나게 띄워 겨울을 보냈다. 음력 정월이면 장을 담그고 갈무리하여 숙성하면 깊고 맛있는 간장과 된장이 되었다. 고추장은 해마다 담그는데 김장 다 해놓고 가을 끝에 했다.

나는 어떻게 살다 보니 한 집에서만 26년을 살았다. 그저 교통 좋고 호수와 공원이 있고, 광교산 등산하기가 좋았다. 파장 시장(작년부터 북수원 시장으로 명칭 바뀜)도 가깝고 대형 마트, 병원, 학교 등 생활하기에 편리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아파트에 살고 있기에 처음에는 장을 담글 생각을 아예 못했다. 그러나 해마다 어머니가 해 주시는 장을 얻어먹는 것도 늙으신 어머니께 할 도리가 아니었다. 처음 장을 담글 때는 그만 실패를 하고 말았다. 아파트 베란다가 남향이고 장이 좀 싱거웠는지 시어 버리고 만 것이다. 간장은 다려서 부어놓으니 괜찮았는데, 된장은 찌개를 끓여도 무슨 나물을 무쳐도 신맛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어머니가 “장은 짜면 탈이 안 나도 싱거우면 탈 난다”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10년째 장을 담그고 있다. 집에서 내가 담근 장이 사다 먹는 간장, 된장, 고추장보다 달지 않고 깊은 맛이 난다. 무엇보다 여러 가지 음식 조리하는 데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흔히 집 간장을 조선간장이라 부르는데 국을 끓일 때 많이 쓴다.

미역국이나 뭇국, 황태해장국, 매생이국, 계란탕, 순두부국, 육개장, 갈비탕, 토란국, 닭곰탕 등에는 조선간장을 넣어야 시원한 맛이 난다.

간장만큼이나 된장의 쓰임도 많다. 된장찌개를 비롯하여 슴슴하게 풀어서 끓이는 된장국의 종류는 냉이 된장국부터 봄에 뜯은 어린 쑥국, 아욱국, 느타리버섯 된장국, 해초 굴국, 시래깃국, 생선탕 등이 있다.

또한 된장이나 고추장은 찌개나 국 이외에도 무침이나 쌈장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렇게 집에서 담그는 장은 방부제가 들어가지 않아서 좋다. 반찬이 없어도 얼마든지 장만 가지고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된장이 너무 짜거나 말라서 딱딱해지면 김장 다 해놓고 메주콩을 뭉근하게 갈색이 나도록 푹 삶는다. 그리고 멸치 다시마 무를 넣고 진하게 육수를 내서, 그 물에 삶은 콩을 으깨서 짠 된장과 섞어놓으면 맛있는 된장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 삼년간 익힌 된장은 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무치는데 조미료를 안 넣어도 참으로 깊은 맛이 나고 맛있다. 직접 장을 담그니 힘든 어머니의 삶도 생각하게 되고 점점 어머니 손맛도 닮아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장을 담근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지인들에게 된장과 고추장을 나누어 준 적이 있다. 그런데 반응이 모두 맛있다며 칭찬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양지바른 아파트 베란다에서 장을 잘 담가 먹었는데 이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분양받은 아파트는 고층이며 발코니 확장공사를 하여 항아리 놓을 곳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올해는 두 배나 많은 장을 담가 놓았다.

이사를 가면 비록 오래된 아파트지만 베란다에서 구수한 장이 익어가는 냄새가 그리워질 것만 같다. 오래도록 산 집이라 정이 들어서 그렇기도 하다. 항아리 속에서 시간의 향기처럼 장이 익어가듯 우리 삶도 익어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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