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김구슬칼럼]새해에는 차근차근, 천천히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

- ‘인생 후르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떨어지고 낙엽이 퇴비가 되어 땅이 비옥해지고 비옥한 땅에 열매가 맺힌다. 잠시만 자연에 눈길을 돌리면 자연은 우리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말해준다. 최근에 일본 노부부의 이야기를 다큐 형식으로 그려낸 영화 ‘인생 후르츠’(Life is Fruity)를 보면서 의미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65년을 함께 해온 90세 츠바타 슈이치와 87세 츠바타 히데코 부부의 아름답고 느린 삶의 이야기다. 노부부는 직접 집을 지어 120여 종의 과일과 채소와 꽃을 직접 길러 먹거리를 즐기면서 느린 삶을 실천해나가는데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자연을 닮았다기보다 자연 그 자체이다.

2018년은 유독 아파트값이 화두가 되었던 한 해였다. 슈이치는 건축가로서 평소 집이란 자연의 숨결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존경하는 선배 건축가의 집을 보고 손수 지은 노부부의 집은 오늘날과 같은 재화의 상징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인격과 가치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슈이치의 건축철학을 잘 반영한다. 영화에서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고 한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노부부가 밭에서 기른 식재료로 음식을 준비하고 식사를 하는 장면에 시선이 머물렀다. 특별히 감자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아내는 갖가지 감자 요리를 해낸다. 그런데 정작 아내 자신은 감자를 제일 싫어해 감자를 전혀 먹지 않는다. 마주한 식탁에서 슈이치는 감자요리를 즐기고 있고 아내는 토스트에 잼을 발라 먹고 있다. 이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각자는 자신만의 개성과 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다름 가운데서 조화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 역사를 보더라도 로마, 몽골 등 성공한 제국은 다름을 인정하고 이를 포용한 제국들이었다. 몽골제국의 징기스칸의 위대함은 이민족의 종교, 문화, 언어를 포용한 관용정책에 있다. 한국은 이질적인 것에 대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측면이 강하다. 세계가 지구촌사회,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차제에 이질적인 것에 대한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동질적인 것끼리가 아니라 상호이질적인 것이 결합할 때 새롭고 창의적인 시너지가 나오는 법이다.

자연이라는 큰 틀을 생각해보더라도 자연 가운데는 인간과 동물, 식물 등 수많은 다른 것들이 어울려 공생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노부부의 나이가 90+87=177이라고 두 사람의 나이를 합해서 말하는 장면 역시 다름 가운데서의 조화로운 공생을 말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남편이 먼저 떠난 다음에도 남편을 위해 생전에 좋아하던 감자 크로켓을 만들어 상을 차려주고 자신은 여전히 토스트에 잼을 발라먹고 있는 모습 역시 이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각각의 개체는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조화로운 공생은 다름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공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오늘날과 같은 초고속 시대에 서두르지 않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을 천천히 해나가고 그 가운데 인생은 여물어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평범하지만 쉽지 않은 노부부의 삶에서 자연의 숭고함이 느껴진다. 남편이 먼저 떠난 후 아내가 어떻게 살아갈까 내심 염려되었으나 크게 흔들리지 않고 땅을 가꾸는 일상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던 것 역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아온 인생철학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차근차근, 천천히/ 인생이 맛있게 영글었다.’ 나도 새해에는 ‘차근차근, 천천히’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고 싶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