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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아포가토(Affogato)의 미학

 

 

 

밤을 건너온 잠의 눈꺼풀이 무겁다. 간밤, 문장을 인수분해 하던 신경은 뒤꿈치를 들고 꿈의 언저리를 헤맸다. 몸은 나른하고 정신의 초점은 흐리다. 카페인의 힘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에스프레소는 너무 쓰고 아메리카노는 너무 싱겁다. 피곤한 뇌가 당분이 필요하다고 달콤한 것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아포가토를 주문한다. ‘빠지다’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 디저트. 에스프레소에 아이스크림이 빠지거나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가 희석되거나. 예를 들자면, 그에게 그녀가 녹아들거나 그녀의 삶에 그가 끼어들거나. 빠진다는 말도 어쩌면 미친다는 말. 빠지는 일은 미치는 일이고 몰두하는 일이고 자신을 불사르는 일. 그래서 사랑에 빠지고 일에 몰두하고 예술에 미치는 것이지.

커피에 잠긴 아이스크림. 유리잔에 담긴 갈색과 크림색의 자태가 말초신경을 건드린다. 원두의 깊고 풍부한 향이 기어이 미각을 깨우고 만다. 하분하분하게 스며드는 이 맛을 어떻게 표현할까. 혀가 누리는 쾌감. 달콤하면서도 쓰고,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게 이와 잇몸과 편도를 골고루 애무하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미각의 클라이맥스. 여기엔 아무 생각도 끼어들 수 없다. 어떤 사유도 어떤 걱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입안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다. 달달한 뒷맛만 남길 뿐. 환희는 짧고 여운은 길다. 누군가 남기고 간 말처럼 간절해서 조금 아리기도 한 여운. 소중한 것은 아이스크림처럼 금방 녹아버릴지 모른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 말의 여운. 그럴지도 모른다. 경험상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수명이 짧았으니까.

아포가토의 정의는 만남이다. 이질적인 만남. 커피와 아이스크림, 단맛과 쓴맛의 만남이다. 카페에서 토론을 즐기는 사람과 펍(pub)에서 축구에 열광하는 사람의 만남, 로켓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관세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물론 공통점도 있다. 예측불허.

물과 기름처럼 판이한 성질의 결합일수록 색다르고 특이한 맛이 탄생한다. 커피의 쓴 맛이 아이스크림의 단맛과 절묘하게 녹아드는 아포가토. 만남은 이렇게 서로가 다를 때 조화롭고 아름다운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 연인이 되고, 친구가 되고 적대국에서 동맹국이 되는 것이지.

하지만 모든 결합이 아포가토처럼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전혀 다른 성질의 만남은 극과 극의 결과를 빚는 법. 최고이거나 혹은 최악이거나.

존 레논과 오노 요코처럼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커플이 있는 반면 어떤 연예인과 야구선수의 만남은 서로를 불행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어떤 만남은 주변국에 한껏 기대와 희망을 주다가도 판을 깨버려 실망을 주기도 한다.

한 스푼이 남았다. 커피가 아이스크림을 녹이는 맛의 진폭은 마지막까지 집요하다. 차고, 부드럽고, 달고, 쓴, 오묘하고 복합적인 맛. 어느 한 가지 감정만 가지고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없듯이, 아포가토를 적확(的確)하게 표현하기는 조금 버겁다. 누군가에게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규정하지도 증명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그렇더라도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맛. 처음과 끝이 동일한 맛은 나를 매료시킨다. 바닥에 남은 한 스푼까지 완벽하다. 만남도 그렇기를. 아포가토처럼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맛, 한결같은 사랑, 한결같은 관계를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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