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슬칼럼]새날이 밝았다, 얼어붙은 강물도 흐르게 하라
[김구슬칼럼]새날이 밝았다, 얼어붙은 강물도 흐르게 하라
  • 경기신문
  • 승인 2020.01.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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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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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협성대 명예교수
시인·협성대 명예교수

한 해를 마감하는 문학 행사에 참석해보면 결국 화제는 이 혼탁하고 불안한 시대에 과연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조 섞인 이야기로 귀결된다. 작가라면 시대를 불문하고 던지는 공통된 화두일 것이다. 영국에서 출생하여 미국 시민이 된 오든(W. H. Auden 1907-73) 역시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 같은 화두를 던졌다.

1939년 1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현대시인이자 극작가인 예이츠(W. B. Yeats 1865-1939)가 작고하자 오든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가(悲歌) 「W. B. 예이츠를 기리며」(“In Memory of W. B. Yeats”)를 썼다. 이 시는 시인의 죽음과 예술을 노래하는 탁월한 비가 중의 하나로 꼽힐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나아가 사회를 개혁할 시인의 새로운 역할을 노래하는 예언적 명상시로도 높이 평가된다.

그는 한 겨울에 사라졌다./ 개울은 얼어붙었고, 공항은 인적이 드물고,/ 눈은 공공 조각상들의 형체를 바꾸어놓았다./.... 그가 죽은 날은 어둡고 추운 날이었다.

(「W. B. 예이츠를 기리며」 1부 첫 부분)

첫 시행은 언뜻 모든 자연 현상이 시인의 죽음을 애도하듯 정지되어 있다는 평범한 비가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연의 상징으로서의 물의 환유인 ‘개울’이나 ‘눈’이 생명력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이츠가 작고한 1939년은 오든 개인으로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해이자, 역사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알리는 중요한 해이다. 정치 사회적 주제를 많이 다룬 오든은 세계사적 문맥에서 시인의 역할을 명상한다.

그대는 우리처럼 어리석었다; 허나 그대의 재능은 이 모든 것을 넘어 살아남았다./....미친 아일랜드가 그대에게 상처를 주어 시(詩)를 쓰게 했다./ 지금도 아일랜드의 광기와 날씨는 여전하다./ 시란 어떤 일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기에. 시는 지배자들이/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창작의 계곡에서 살아남는다,.../ 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방식, 하나의 입으로 살아남는다.

(「W. B. 예이츠를 기리며」 2부 일부)

예이츠는 식민지 조국 아일랜드의 독립과 문예부흥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란 어떤 일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기에” 시를 통해 어떤 사회적 변혁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아일랜드의 광기가 여전한 이유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시는 자신만의 영역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의 손이 닿지 않는 신성한 영역이다. 시는 “하나의 입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넘어서는 영혼의 언어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시를 경작하여/ 저주를 포도밭으로 만들고,/ 고통의 환희 가운데서 인간의 실패를 노래하라./ 가슴의 사막 가운데/ 치유의 샘물이 솟게 하고,/ 그대가 보낸 세월의 감옥 속에서/ 자유인에게 찬미하는 법을 가르쳐라.

( 「W. B. 예이츠를 기리며」 3부 일부)

더 근원적으로 생각해보면 실낙원이 환기하듯이 인간은 운명적으로 저주를 피할 수 없고 고통과 실패 역시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존재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숙명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허나 저주를 결실과 희망의 포도밭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시인에게는 있어 사막 같이 황막한 가운데서도 치유의 샘물이 솟게 하고 이 포도주로 감옥 같은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수도 있다. 나치의 광기가 서린 시대의 어둠가운데서도 고통까지 황홀하게 끌어안으며 실패를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영혼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야말로 자유의 입으로 살아남아 삶의 의미를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이다.

새날이 밝았다. 얼어붙은 강물도 흐르게 하는 시 정신으로 이제 ‘거짓과 위선을 울려 보내고 진실과 정의와 사랑을 울려’ 맞이하는 새해, 경자년을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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