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온기에 대하여
[생활에세이]온기에 대하여
  • 경기신문
  • 승인 2020.01.06 19:32
  • 댓글 0
  •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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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안수필가
최지안 수필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여름은 잘 견디는데 겨울이 힘들다. 한여름에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더워도 얼음물은 잘 안 마신다. 시원한 것보다는 따뜻한 것이 좋고 시원시원한 사람보다 따뜻한 사람이 더 좋다.

털실로 짠 스웨터가 좋고 극세사 이불이 좋고 포근한 목도리가 좋다. 봄빛을 닮은 고양이의 털이 좋고 날 위해 건넨 따뜻한 커피가 좋다. 따뜻한 가슴과 눈빛과 손길이 좋다. 따뜻한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말의 온기가 좋다.

온기라는 말을 하면 몸속부터 데워지는 것 같다.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손에서 온기가 느껴지면 반쯤은 친해진 것 같다. 사람은 상대의 체온을 느낄 때 마음의 벽을 허문다. 친구들과 잡은 손에서 전해진 온기는 평생을 가지 않는가.

사람과 만나 악수를 할 때에도 우리는 온기를 느낀다. 손을 내밀어 상대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상대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손을 내민다. 손을 잡아 서로의 온기를 전달하는 행위로 상대에게 믿음을 준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 뜨거운 말은 상대를 녹인다. 그러는가 하면 냉기가 흐르는 말은 상대의 심장을 얼린다. 미지근한 말은 신뢰를 주지 못하고 차가운 말은 상대를 돌아서게 만든다. 조언을 한다면서 상대를 판단하고 깎아 내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걱정 되서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상대의 결점을 들춰낸다. 아무리 그 사람이 내게 잘해줘도 말을 섞기 싫다. 따끔한 말보다 따뜻한 말에 마음이 열리는 법인데.

이 말을 하는 나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한다. 아이를 학교에서 데리고 오는 길이었다. 아이의 얼굴이 어두웠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영어 시험 성적이 나와서 그렇다고 했다. 점수는 두 개 등급이 낮아졌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지금껏 유지한 등급이 확 내려갈 것이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도대체 얼마나 공부를 안했기에 한 등급도 아니고 점수가 그렇게 내려갈 수가 있니’라는 말을 간신히 누르고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속상하니 엄마도 이렇게 속상한데!”

숨을 들이 쉬었다. 그 말은 참 잘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50점짜리 엄마였다. 너무 속상해서 그 다음 말을 해주지 않았다. 아이는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엄마에게 속상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마음보다 내 감정에 더 충실했다. 내가 좀 더 현명했다면 아이에게 힘을 주는 따뜻한 말을 했을 텐데. 그랬다면 100점짜리 엄마였을 텐데. 이후로 나보다 큰 아이를 자주 안아준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도 그렇지만 그냥 따뜻하게 품어주고 싶다.

‘허들링(huddling)’이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남극의 혹독한 추위에서 사는 동물 중에 황제 펭귄이 있다. 귀엽고 재미있게 생긴 이 동물이 추위를 이기는 독특한 방법이 허들링이다. 황제펭귄은 최대한 가까이 밀집해서 서로 둥글게 원을 그리는데 자연히 원 바깥쪽은 춥고 안쪽은 따뜻하다. 이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자리를 바꾼다. 안쪽에 있는 펭귄이 추위를 녹이면 바깥쪽으로 나가는 식으로 원이 유지된다. 신기하다. 서로의 온기와 배려가 없다면 그들은 추운 남극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다. 마트에서 먹을 것을 훔친 부자(父子)에게 국밥을 사준 경찰관과 부자에게 20만원이 든 돈 봉투를 주고 떠난 어느 남자의 이야기. 경찰관이 했던 말이 가슴을 울렸다.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온기 있는 그 한마디에 우리는 뜨거워졌다. 우리 사는 이곳이 살 만 하다는 것이고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새해다. 올해는 따뜻한 말을 하고 따뜻한 일을 하자고 다짐한다. 나의 온기로 누군가를 따뜻하게 하는 일. 사람으로 태어난 내가, 사람이라는 혜택을 받은 내가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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