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의 향기]부부, 그 사랑의 서사시- 4백 년 전에 쓴 편지
[고서의 향기]부부, 그 사랑의 서사시- 4백 년 전에 쓴 편지
  • 경기신문
  • 승인 2020.05.2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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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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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기시인·서지학자
김운기
시인·서지학자

 

5월 21일은 부부의 날로 지정된 기념일이다. 2007년도에 법정 기념일로 정해졌는데 ‘둘이 하나 되는 것’이 부부라 하여 21일로 정했다 하니 부부의 의미를 숫자로 잘 정의했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복잡하고 다양하게 진화된 사회구조에서 부부의 관계와 의미를 숫자 하나로 단순히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부란 인륜의 원천이며 사회구성의 시작이기 때문에 ‘둘이 하나 되는 것’으로 정의한 21일은 지당한 발상이다. 그렇다면 과연 부부란 무엇인가? 필자는 430여 년 전에 망자(亡者)의 아내가 쓴 한 통의 편지에서 부부란 무엇인가를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내샹해날려닐오 (자네는 항상 내게 말하기를)’로 시작하는 이 편지는 수신자가 ‘워니 아바님께’로 하여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에 쓰인 것으로 되어있다. 죽은 남편을 매장할 때 관속에 함께 넣은 아내의 한글 편지인데 1998년, 택지개발이 한창이던 경북 안동시에 소재한 정상동의 언덕 기슭에서 이름 모를 무덤을 이장하던 중에 관속에서 발견된 수습유물 가운데 하나다. 유물 분석결과, 무덤의 주인은 고성이씨(固城李氏) 응태(應台)이며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둘 사이에 ‘원이’라는 아이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원이 아버지께 올립니다.

자네는 늘 내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 희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십니까. 나와 자식은 누구를 의지하여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자네 먼저 가십니까. 자네는 내게 어떤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자네에게 어떤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언제나 함께 누우면 나는 자네에게 말하곤 했었지요.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하고 자네께 말하곤 했는데,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자네를 여의고는 아무래도 나는 살 수 없어, 빨리 자네에게 가고자 하니 나를 데려가 주세요. 자네를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찾을 길 없고 서러운 뜻 끝이 없습니다. 내 마음과 몸은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자네를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자네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자네는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할 말 있다 하고는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것인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자네는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네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 자네를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도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특히 유물 수습과정에서, 건강하지 못한 남편이 회복되어 걷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미투리(신발)가 이 편지와 함께 발견되었다. 얼마나 아름답게 슬픈 감명인가. 내용은 필자가 현대문으로 바꾸었으나 2인칭으로 쓴 ‘자네’라는 호칭을 그대로 둔 까닭은 430년 전의 부부간 호칭이 사뭇 흥미로워서다. 지금 부부간에 사용하는 ‘당신’ 정도로 쓰일 호칭이 당시에는 남녀 구분 없이 동등하게 ‘자네’로 통일해서 썼음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우리가 알았던 것보다 더 남녀가 동등했다는 사실들이 여러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처가살이를 당연시한 것은 물론, 아들이 없을경우 차양(次養)하지 않고 딸로하여금 봉제사하도록 했고, 분재(分財) 과정에서도 출가한 딸에게 전혀 차등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편지에서 남편을 ‘자네’라 부른 호칭이 결코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도 안동시 정하동 고성이씨의 세거지였던 귀래정(歸來亭) 근처에는 원이 엄마의 편지를 담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만인에게 ‘부부의 정’을 알리고 ‘부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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