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는 그 직무를 수행할 때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적법절차를 준수하며,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고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 된다.” ‘검찰청법’이 검사의 직무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검창청법은 검사에게 ‘국민의 봉사자’, ‘인권의 수호자’ 그리고 ‘정치적 중립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형태는 세 가지이나 이들은 하나로 수렴한다. ‘정치적 중립’이다. 국민 전체에게 봉사하라는 것은 국민을 받들어 모시라는 뜻이 아니다. 국민의 뜻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선출직 공직자, 즉 정치인들의 의무다. 검사는 법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면 된다. 조금 무리하게 표현하면 검사가 판단하고 행동함에 있어 국민의 뜻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고려하는 순간 검사라는 신분 앞에 ‘정치’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 그럼에도 검찰청법이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국민을 차별하지 말라는 의미다. 모든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세에서 개개의 국민 한명, 한명을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라는 명령이다. 인권의 수호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수사권과 기소권에서 그치지 않고 영장청구권까지 독점한 검찰이 국민을
형사사건에 변호인으로 참여해 보면 때때로 한 없이 초라한 나의 모습을 보게 되고는 한다. 모든 증거는 검찰이 가지고 있고 검사는 유죄입증에 유리한 증거만 제출한다. 수사를 통해 무죄 입증에 결정적인 증거를 입수했다고 해도 법정에 증거로 제출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변호인 입장에서는 그러한 증거가 검사에게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천신만고 끝에 증거의 존재를 알게 된다고 해도 이를 검사로부터 얻어내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에 가깝다. 예컨대 지난 2010년 용산 사건에서 검찰은 재판부의 공개결정에도 수사기록을 제출하지 않고 버텼다. 결국 검찰 손에 있는 증거는 검찰이 제출하기 전에는 변호인 심지어 판사마저도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형사법정에서 변호사는 의뢰인의 무죄 입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변호인이 되고는 한다. 압도적인 수사력을 통해 수집한 증거 중 유죄의 입증에 유리한 증거만 제출하고는 하는 검찰을 상대로 무죄를 받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불가능”이라 말하고 싶지만 “가깝다”는 수식어를 붙이 이유는 2019년 기준 무죄선고 비율이 0.82%이기 때문이다. 형사법정에 들어간 피고인 100명 중 고작 한 명 정도
‘특수(特殊)’의 사전적 정의는 “특별히 다름”이다. 다름의 대상은 ‘일반’일 것이다. ‘일반’의 사전적 정의는 “특별하지 아니하고 평범한 수준”이다. ‘다름’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점”이다. 흔히 사용되는 ‘특수’, ‘일반’, ‘다름’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본 것은 근래에 들어 이들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수’는 ‘일반’과 ‘구별’되는 무엇이다. 구별된다는 것은 기본 속성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한다. 근본은 같으나 몇몇 특징에서 그분이 되는 것을 우리는 ‘일반’과 ‘특수’로 나눈다. 아예 다른 종류라면 어느 것이 ‘일반’이고 어느 것은 ‘특수’가 될 수 없다. 그저 전혀 다른, 상관없는 개개의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특수’ 역시 ‘일반’이 가지고 있는 기본 속성 또는 원칙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다만 예외적으로 몇몇 부분에서 특별히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요즘 국회는 법무부 특수활동비로 시끌벅적하다. 법무부가 대검찰청 특수활동비 사용이 적절했는지 감찰을 하겠다고 하자 야당은 법무부 특수활동비도 검증하고 나섰다. 법무부에서 특수활동비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자 야당은 다시 정부부처 전반에 걸
2017년 1월 25일 국정농단의 주역이었던 최순실은 수의를 입고 특검조사를 받으러 가던 중 취재진을 향해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특검이 아닙니다”고 소리쳤다. 취재진을 향해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녀의 모습은 자못 장엄하게까지 보였다. 그러나 이를 생방송으로 지켜보던 국민들 중 많은 이는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한 그녀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생방송 카메라를 통해 전국에 중계된 통쾌한 한 마디가 있었다. 특검이 위치한 건물의 청소부로 일하던 한 여성이 최순실을 향해 “염병하네”라고 소리친 것이다. 이는 국정농단 사건에 분노하고 답답해하던 많은 국민들에게 사이다와 같은 외침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최순실을 향해 외쳤던 ‘염병(染病)’은 원래 장티푸스를 일컫는 단어였다. 장티푸스는 살모넬라균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전염병으로 발열과 복통이 주요 증상이다. 현대 의학이 도입되기 전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고열과 복통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것을 전염병이라 생각하고는 했다. 때문에 ‘염병’은 물들 염(染)자와 질병 병(病)자의 조합에서 알 수 있듯 차츰 전염병 그 자체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치사율
현대 물리학의 거장 아인슈타인의 대표 업적은 ‘상대성 이론’이다. 상대성 이론은 ‘일반 상대성 이론’과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구성된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지 100년이 넘었다. 이제 아인슈타인과 상대성 이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씩은 들어봤음직한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상대성 이론은 전공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이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성 이론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일반 상대성 이론’ 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이 더 발전 된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1905년 발표한데 반해 일반 상대성 이론은 10년이 지난 1915년에 발표했다. 보다 더 발전된 이론은 10년이나 일찍 발표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속도가 통제되는 특수한 상태에 적용되는 이론이다. 반면 일반 상대성 이론은 속도가 서로 다른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일반이론이다. 때문에 특수 상대성 이론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발전된 이론인 것이다. 이는 물리학에 국한해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 역시 우리가 디디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학문이다. 일반과 특수의 관계 역시
검찰사건사무규칙 제69조 제3항 제4호는 피의자가 사망한 경우 ‘공소권 없음’ 결정을 하도록 한다. 공소권 없음은 형사법이 피의자의 죽음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공소권이란 검사가 법원에 공소(公訴)를 제기할 수 있는 권(權)리다. 공소를 제기함으로써 비로소 검사는 피고인의 행위가 범죄에 해당함을 입증하여 처벌을 구할 수 있게 된다. 공소권 없음은 이처럼 검사가 피고인을 법정에서 세워 유죄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형사소송법 제195조는 검사는 범죄의 혐의 있다고 판단될 때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를 수사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범죄사실은 범인의 행위다. 증거는 행위가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요소다. 결국 수사의 핵심은 범인이다. 그렇기에 범인이 없으면 수사 또한 불가능하다. 범인이 사망하면 수사의 대상이 사라지고 공소권은 없어지는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루 전인 8일에는 전 비서에 의해 강제추행 등 혐의로 경찰에 피소되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경찰은 곧 해당 사건을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하였다고 발표했다. 피혐의자가 사망하여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한 조치다. 서울시는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서울특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우리의 소원’이라는 제목의 노래다. ‘우리의 소원’은 몇 차례의 개사를 겪었는데, 여기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제 강점기 삽화가, 만화가, 문학가, 영화 각본가 겸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던 안석영(본명 안석주)이 그의 아들인 작곡가 안병원의 곡에 글을 써준 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우리의 소원’은 1947년 3월 1일 한국방송의 삼일절 특집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1948년이고 한국전쟁의 휴전으로 분단체제가 시작된 것이 1953년이니 노래가 발표될 시점에는 ‘통일’을 부르짖을 이유가 없었다. 분단되지 않은 조국에서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의 소원’에도 ‘통일’은 없었다. 원래 노랫말은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출신이었던 안석영이 좌우익 세력 사이의 충돌이 극심했던 미·소 군정기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꿈꾸며 써내려간 가사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에서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란 대목이 “
시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권력은 시민 개개인으로부터 위임받아 형성된 위임권력이다. 위임권력은 시민의 그것에 군림할 수 없다. 다만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일정한 경우 법률에 의해 제한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제한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헌법 제37조 제2항이 규정한 법률유보의 원칙이다. 근래 들어 헌법 제37조 제2항이 대한민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바로 ‘대북전단살포’ 때문이다. 최근 북한의 김여정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군사적 행동까지 언급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경기도가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 할 경우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고 나서면서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하겠다는 주최 측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이 역시 자신들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했듯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권리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표현의 자유는 여타 다른 권리보다 더욱 두텁게 보호 되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작동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자유롭게 참여함으로써 유지·발전된다. 좁게는 시민들이 살아가는 마을 공동체 넓게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