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수'검색결과
상세검색모래 커피를 제대로 내려주는 곳이 홍대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나라에 들여온 모래 커피의 맛은 어떨까. 모래 커피의 나라, 튀르키예에서 직접 맛본 것은 텁텁하고 달아서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모래 커피를 내리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커피를 주문 받은 주인은 주문대 옆의 테이블에서 퍼포먼스를 벌인다. 300-400도로 달궈진 모래 위, 체즈베(Cezve)라는 커피 추출용 주전자를 이리저리 옮기며 데운 끝에 달걀 크기 잔에 커피를 담아내준다. 다 마신 후에는 커피점 치는 것을 도와준다. 튀르키예 미신인데 과정도 내용도 사랑스럽다. 커피 마신 잔을 엎어서 돌린 후, 잔 속에 남은 무늬를 보고 예언을 한다. 예를 들면 강아지 모양이 나오면 인기가 많아지고, 물고기 모양이 나오면 일자리를 얻거나 돈이 들어오고, 하트 모양이 나오면 사랑을 이루거나 결혼 하게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커피는, 튀르키예인의 사랑과 결혼 과정에서 관례로도 오랫동안 뿌리내렸다. 이슬람 문화권이라 자유연애가 쉽지 않았던 과거, 튀르키예에서는 신랑 어머니들이 며느리감을 찾아다녔다. 청혼 받은 신부는 상견례 때 커피를 내오는데, 커피 타는 실력으로 요리 솜씨를 짐작했다. 그 과정에서 신부는 신랑감에 대한 호감 정도를 커피를 타며 표현했다. 마음에 들면 설탕을 듬뿍 넣는 것으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금을 탔다. 더 재미난 이야기. 옛날, 가장인 남편이 하루 할당량의 커피를 준비 못하면 이혼청구 권리를 여성에게 법적으로 주었다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삶에 커피가 이렇게 깊이 관련된 나라가 튀르키예 말고 또 있을까. 궁금증은 커피의 역사를 통해 풀린다. 커피의 탄생에 대한 여러 설 가운데, 6세기 무렵, 아비시니아( 지금의 에티오피아 ) 양치기 칼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빨간 열매를 먹은 후 밤낮으로 뛰노는 염소들을 본 칼디는 직접 맛본 후, 정신이 각성되는 체험을 한다. 칼디의 이야기는 수도원에 알려졌고, 이후 수도사들은 이 빨간 열매를 물과 섞어 마시며 공부와 기도에 효율을 얻는다. 에티오피아의 커피는 전쟁, 무역, 무슬림 순례자 등을 통해 아라비아 반도로 전파되는데, 예멘의 모카 지역이 생장의 적지였다. 예멘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유일하게 커피 농사를 지은 곳이자 커피문화를 태동시킨 곳. 이 예멘을 16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면서 커피 문화는 세계로 확산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만 제국은, 약 600년에 걸쳐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등 3개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지 않았던가. 카페의 시작도 오스만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커피를 '카흐베(Kahve)’라고 불렀는데, 1475년, 선보인 '카흐 바 하네(커피 집)' 라는 가게를 카페의 원형으로 본다. 커피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인 커피 포트의 시작도 오스만의 체즈베라 할 수 있고, 오랫동안 대화 하며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개발된 오스만의 '자르프'라는 잔은 커피잔의 시작이었다. 커피문화를 발흥 시켰던 오스만 제국의 후예인 튀르키예에서 커피 문화가 삶과 뒤섞인 것이 이해 된다. 조만간 '모래 커피 카페'를 찾아가 튀르키예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봐야겠다. 모래 커피를 마시며, 터키 팝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세잔 악수( Sezen Aksu )의 노래를 들으면 어떨까. 오스만의 영화와 폐허, 이슬람의 영성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와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탈리아 칸초네 3곡을 꼽으라면 산타 루치아,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레미오가 아닐까 싶다. 가사를 몰라도 격정과 애수 가득한 멜로디가 심장으로 직진한다. '노래'라는 뜻의 칸초네는 이탈리아의 민요, 대중가요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세상의 모든 가요가 그렇듯이 사랑과 이별, 우정,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소재로 하고 있어 가사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번역해 가사를 들려주면 멜로디처럼 이국적이고 시적인 노랫말을 기대했던 이들은 살짝 실망한다. 그런 이들에게 이 노래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타 루치아의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처럼 흥미진진하다. 4세기 초, 로마제국 시절, 시칠리아에 살던 처녀 루치아는 출혈이 멈추지 않아 죽어가던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성녀 아가다의 무덤을 찾아가 눈물로 기도한다. 기적적으로 어머니가 살아나자 루치아는 남은 삶을 예수님께 바치기로 하고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다. 문제는 루치아에게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는 것. 약혼자는 파혼보다 곧 제 손에 들어올 것으로 생각한 루치아의 재산이 날아가는 것에 분개한다. 그래서 집정관에게 그녀가 기독교도(당시 불법이었던)라는 것을 고발한다. 로마 법정은 루치아의 눈을 뽑고 매음굴로 보내라 명한다. 그런데 기이하게 루치아의 몸은 여러 장정들이 달려들어도 꿈쩍 하지 않았고 화형을 시키려 해도 불붙지 않아 결국 칼로 최후를 맞는다. 그 후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한 뒤, 루치아는 성녀로 지정된다. 루치아의 시신을 거둔 곳은 베네치아. 산타 루치아 성당과 역의 유래다. 루치아가 당한, 눈 뽑힌 고문에서 기인했는지, 빛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루체( Luce)와 이름이 비슷해서인지, 성녀 루치아는 이탈리아에서 시력 보호의 성인으로 숭앙받아왔다. 12월 13일이 루치아 성녀의 축일인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날, 눈알 모양의 빵을 먹으며 눈병 없기를 기원한다나. 루치아 수녀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여러 화가들의 그림 중, 스페인 화가 주르비란의 그림을 보라. 붉은 조끼를 입은 루치아가 오른쪽 손에 접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접시 속에 담긴 것은 놀랍게도 눈알 두 개다. 섬뜩하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이야기도 재미있다. 1902년, 호텔 경영자이기도 한 소렌토 시장 트라몬타노는 마을 주민들의 꿈인 '우체국 건립'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즈음, 수상이 재해 현장 방문을 위해 소렌토를 찾았다가 트라몬타노의 호텔에 묵게 된다. 트라몬타노는 기회를 놓칠세라 수상에게 우체국 건립을 부탁한다. 수상은 긍정적인 답변을 준다. 수상의 마음이 변하거나 잊어버릴까 전정긍긍한 트라몬타노는 급히 작사, 작곡자를 섭외해 노래 한 곡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수상이 호텔을 떠나는 날, 미리 불러온 가수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 노래가 바로 '돌아오라 소렌토로'다. 번안 가사로 귀에 익은 산타 루치아는 인생 찬가인데 알고 보니 종교 박해로 비참하게 죽은 처녀 루치아의 비극적인 삶을 품은 노래라는 것, 그리고 제목과 분위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 혹은 이별 노래로 알았던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우체국 청원가였다는 것, 이 사실을 알고 노래를 듣게 되면 명곡의 환상이 깨지지 않을까.
치즈광인 친구에게 특식을 사겠다고 퐁듀 전문집에 데려갔다. '다소 비싸지만,아주 맛있다 '는 소개를 듣고 찾아갔는데 전언과 달리 다소 맛있는 정도였고 아주 비쌌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며 괜히 퐁듀의 기원을 입에 올리며 감정을 푼다. '퐁듀가 사실 옛날 스위스 사람들, 한 겨울에 굶어죽지 않으려고 먹었던 음식인 거 알아? 겨울되면 광 속에 딱딱한 빵, 굳은 치즈만 굴러다녔는데 그걸 먹겠다고 포도주에 치즈 녹이고 빵 찍어 먹은 게 퐁듀의 유래야' 친구는 퐁듀 얘기보다 스위스 사람들의 가난했던 과거사에 관심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스위스의 국가 이미지는 거의 유토피아다. 만년설을 인 알프스와 서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인 레만호를 가진 자연 청정국, 세계 최고 명품 시계, 초콜릿, 치즈로 유명하지만, 실상 관광업, 금융업, 의약품, 제조업 등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 9만달러가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나라, 영세중립국으로서 500년간 전쟁 없이 무장평화를 유지해온 나라. 전 세계의 부러움을 받는 스위스도 18세기까지 유럽의 빈국, 약소국이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험준한 알프스산이 국토의 70%, 호수까지 치면 75%가 농사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인데, 그나마도 냉해가 잦아 굶주림이 국민의 일상이었다. 떠돌다가 외국까지 나가 살 길 찾던 이들은 전쟁터에 나가 대신 싸워주는 용병에 자원한다. 그 유명한 '스위스 용병'의 탄생 배경이다. 스위스 용병이 왜 유명했는가. 신의와 용맹성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로마 교황과의 갈등 끝에 침략했을 때, 로마 성벽을 지키던 스위스 근위대 500명의 이야기가 있다. 근위대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피신할 때까지 끝까지 엄호하며 적에 맞선다. '도망가도 좋다'는 교황의 권고가 있었지만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아 결국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후인 1792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머물고 있는 튈르리 궁에 분노한 민중들이 몰려들었다. 겁에 질린 왕의 근위병들은 모두 도망갔는데, 끝까지 왕실을 사수한 이들이 있었으니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이었다. 시민들은 죄없는 그들에게 퇴로를 열어주었으나 용병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맞서 모두 전사한다. 여기서 나오는 의문. 왜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살 길을 주는데도 마다하고 목숨을 내놓고 싸운 것일까. 당시 전사한 한 용병이 가족에게 썼다는 편지에서 그 답을 얻는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신용을 잃으면 후손들은 영원히 용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약을 지키기로 했다' 스위스 시계가 세계 최고 명품이 된 이유로 두 가지를 드는데, 그들의 제조기술과 신뢰다. 스위스의 격을 높이는 '신뢰'의 배경에는 그같이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다. 요들은 어떤가. ('요들송'하면 스위스 현지에서 못 알아듣는다. '요들'이 맞다) 수려한 알프스 초원을 배경으로 '요드레이~ 요드레이~' 하는, 독특한 발성의 스위스 민요. 전통의상 드린딜을 입은 여성들과 레더호젠 입은 남성들이 손에 손잡고 춤춰야 할 것 같은 이 신나고 재미난 노래는 사실, 높은 산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양치던 목동이 먼 산의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였다. 늑대같은 위험한 짐승의 출현 등 갈급한 신호를 보낼 때, 홀로 산을 지키다 외로움에 못이겨 먼 산의 누군가를 부를 때 내던, 고독과 공포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퐁듀 맛처럼, 요들도 역사를 알고 나면 다르게 다가온다. 깊고 다채롭다. 그 맛을, 요들의 대가, 독일의 프란츨 랑(Franzl Lang)이 목소리로 느껴보시길.
이 노랫말을 들어보시길. 병영 앞 대문 앞에 가로등이 켜져 있네/ 여전히 그 앞에 서 있는 그녀/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려 하네/ 가로등 곁에 서 있고자 하네/ 예전에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예전에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후략… 단박에 사랑 노래라는 것, 릴리 마를렌이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기존 가요 가사와 별다른 것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야기 하나 들어보시길. 2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패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던 미군 병사가 독일군 저격병에게 잡힌다. 미군 병사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소원 하나만 들어달라고 청한다. 미군 병사는 지니고 있던 트럼펫을 꺼내 생애 마지막 연주를 한다. 독일군의 손에 쥐어진 총구가 흔들리고 그의 뺨에 눈물이 번진다. 연주가 끝나자 독일 병사는 총을 버리고 가버렸다는 이야기. 미군병사가 연주한, 죽음에서 그를 구한 곡은 앞서 소개된 '릴리 마를렌(Lili Marleen)'이었다. 독일의 사랑 노래 '릴리 마를렌'은 두 군인의 마음만 흔든 곡이 아니다. 2차 대전 중 수많은 군인들을 울렸다. 노래가 만들어진 것은 1915년.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독일병사 한스 라이프(Hans Leip)는 고향의 애인 릴리와 닮은 전쟁터의 간호사 마를렌을 보고 한 편의 시를 쓴다. 시의 제목은 ''등불 아래 소녀'. 작곡가 노르베르트 슐체는 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었고 1939년, 가수 랄레 안델젠(Lale Andersen)의 목소리로 레코드판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불붙은 시기인데다 레코드판을 고작 700장만 만들었기에 주목은커녕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 운명의 노래였다. 1941년,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 독일 군대는 베오그라드에 독일군 방송국을 만든다. 장교 한 사람이 방송에 틀 생각으로 비엔나에서 중고레코드판들을 사왔는데 그 가운데 릴리 마를렌이 끼어있었다. 판이 부족한 터라 릴리 마를렌을 자주 틀게 되었는데 이 노래가 독일 병사들을 흔든다. 병사들은 릴리 마를렌을 들으며 고향의 애인, 어머니 등 그리운 이들을 떠올렸고,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의 공포와 시름을 달랬다. 이를 안 나치 독일 선전부의 요제프 괴벨스는 아군의 전의를 상실시키는 곡이라고 방송금지령을 내리고 원곡을 부른 가수 안델젠을 체포 한다. 그러자 방송국으로 릴리 마를렌을 틀어달라는 병사들의 신청과 항의가 쇄도, 결국 괴벨스는 금지를 푼다. 릴리 마를렌은 그 이후, 매일 밤 9시 55분, 방송을 끝내는 시그널 음악으로까지 만들어졌으니 그 인기가 짐작이 간다. 노래는 자국 병사들 뿐 아니라 독일방송을 도청하던 미군과 영국군 등 적군의 진영까지 열병처럼 퍼져나갔다. 나치 선전부는 이를 알고 이 노래를 적군의 향수병을 자극해 사기를 떨어뜨리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적의 진영을 향해 수시로 이 노래를 틀어댄 것이다. 그러자 연합국 쪽에서 한술 더 떠 독일 최고 인기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목소리로 릴리 마를렌을 틀어댔다. 헤밍웨이가 '남자들은 그 목소리만 들어도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한 그 여배우, 디트리히 말이다. (디트리히는 반나치주의자였다) 한 곡의 노래가 전쟁터를 흔들고 아군과 적군의 경계마저 지웠다. 세계 전쟁사에서 유래 없는 일이었다. 릴리 마를렌이 왜 그토록 많은 병사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을까? 처음 노래를 불렀던 랄레 안델젠은 한 기자의 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바람이 왜 폭풍이 되는지 설명할 수 있나요?' 이 노래는 전쟁 후 40여개 나라 말로 번역돼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되는데,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최고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안델젠의 말을 되새겨 보시길. (인터넷 창에서 www. 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 중에 포르투갈에서 온 단어들이 있다. 우리가 일상용어로 쓰는, 빵, 담배, 카스테라, 사라다, 끼같은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포르투갈에서 직접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역사적, 지역적으로 너무도 멀고 먼 포르투갈 말이 어떻게 일본에 흘러든 것일까. 포르투갈은 유럽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다. 1549년, 포르투갈인을 태운 중국배가 악천후로 표류하다 일본 다네가 섬에 닿는다. 포르투갈과 일본의 첫 만남이었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는 동서양의 다양한 문물을 주고받는 교역국이 된다. 이렇게 일본에 스며들게 된 포르투갈어가 일본식으로 바뀌어 우리나라까지 전해진 것이다. 교역까지 나아가지 않았지만, 우리 조선 땅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서양인도 포르투갈인이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 하멜보다(1653년) 70년 앞서 도착한 서양인에 대한 기록이 '선조수정실록'에 나와있는데 그 시대에 중국, 일본 등 극동과 활발히 교역하던 이들이 대다수 포르투갈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문헌은 아니지만, 영국 역사가 찰스 복서의 '포르투갈 해양제국'이란 책에 '1577년, 일본으로 가다 표류해 조선땅에 이른 포르투갈인 도밍고스 몬테이루 선장'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의 주역은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으로 알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유럽 서쪽 끝 약소국인 포르투갈이 어떻게 그 나라들보다 앞서 대항해시대를 연 것일까. 기원전 12세기에 페니키아인이 건설했고 켈트족도 건너와 살았다는 이 땅의 이후 역사는 끊임 없는 강대국의 침탈로 얼룩져있다.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서고트족, 이슬람 세력 등이 차례로 이 땅에 쳐들어왔는데, 특히 로마는 약 400년, 이슬람 세력은 약 500년이란 장구한 기간을 장악했다. 그래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독립한 것은 포르투갈이 스페인보다 앞섰다. 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1492년보다 70여 년 앞서 세계 곳곳을 누빈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1415년,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북아프리카 세우타를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 3개 대륙에 걸쳐 식민지를 건설하며 해양대국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580년, 왕가의 분규로 60년간 스페인 지배를 받았고, 또 식민지 전쟁에 합세한 영국과 네덜란드 등에 밀렸다. 19세기 들어서는 프랑스 나폴레옹의 침략,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독립, 정치 사회의 혼란 등으로 다시 예전의 유럽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민중음악 파두는 포르투갈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 부침이 만들어낸 음악이다. 해양왕국 시절은 물론 이후에도 바다는 포르투갈인들에게 엘도라도였다. 수많은 이들이 모험과 개척을 위해 미지의 배에 올랐다가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바닷가에서 기약 없이 남편을, 애인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애끓는 심사, 죽어돌아온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던 소리,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절망의 한숨……이 모든 것이 파두를 만들어냈다. 기원을 알고 들으면, 울음같고 한숨같고 절규같은 파두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도 파두가 낯설다면 이 절창을 들어보시길 바란다. 파두는 시처럼 아름다운 노랫말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노래다.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이 모든 것이 파두(Tudo isto e fado)’. 어느날 당신이 내게 물었지/ 파두가 뭔지 아느냐고/…중략…/ 지금 말해줄게/ 패배한 영혼들, 길잃은 밤들/ 모우라리아의 이상한 그림자들/ 한 녀석이 노래를 하고 기타들은 울고/ 사랑과 질투, 재와 화염, 고통과 죄/ 이 모든 것이 존재하고 이 모든 것이 슬프고 이 모든 것이 파두라고…후략… (모우라리아는 리스본의 파두로 유명한 마을) 해양왕국 포르투갈의 그림자, 포르투갈 민중의 상처가 파두다. 그 파두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된 것을 보면 아니러니다. (인터넷 창에서 www. 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 곡의 음악이 여행을 부르기도 한다.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그 예다. 스페인을 처음 여행했을 때 3박 4일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남단 도시 그라나다까지 간 것은 그 연주곡의 탄생지를 직접 딛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곡을 만든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arrega 1852-1909)의 작곡 배경을 들으면 음악이 더 사무친다. 타레가는 음악을 배운 제자, 콘차 부인을 사랑하게 된다. 유부녀였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고백조차 못한 상처를 품고 여행길에 오른 타레가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이른다. 사랑에 빠지면 아름다운 모든 것은 임을 떠올리게 한다. 어둠 내린 알함브라 궁전 위에 뜬 달을 바라보다, 콘차 부인을 생각한 타레가. 그 풍경이 가락을 만들어냈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탄생시킨다. 사연을 알고 들으면 옥구슬 굴리는 듯한 트레몰로(Tremolo)멜로디가 타레가의 눈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표현한 듯 느껴진다. 타레가의 작품과 연주는 19세기까지 별 볼일 없는 악기였던 기타의 황금시대를 열었는데, 그 중심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있다.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 영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다. 기원전 13세기 이후,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인에 이어 로마인의 땅이 된 이베리아 반도는 기원 후 5세기에는 게르만족 일파인 서고트족에 점령된다. 711년, 북부 아프리카의 무어족, 우마이야 왕조가 바다를 건너 침탈,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왕국을 세운다. 이슬람 세력에 의해 북쪽 끝으로 쫓겨간 이베리아 반도의 주민들은 기독교 깃발을 꽂은 작은 왕국들을 건설, 길고 긴 국토회복 전쟁을 시작한다. 이를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 한다. 800년 가까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은 13세기 초반, 북쪽에서 힘을 키워온 기독교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14세기 초반, 최남단의 그라나다 왕국만 남기고 쫓겨난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의 술탄 무함마드 1세가 1238년,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 100여 년간에 거쳐 형성한 곳이다. 1492년, 스페인 연합왕국은 그라나다 왕국마저 멸망시켜 레콩키스타를 완성한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의 피바람 나는 역사가 시작된다. 자국 내에서는 종교 재판소를 만들어 이슬람, 유대인 등을 박해했고, 나라 밖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 원주민들을 대거 살상하며 식민지화한다. (1492년, 이사벨 1세 여왕의 후원을 받은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 시작이었다 ) 막대한 아메리카 식민지에 네덜란드, 포르투칼 등을 점령, 16세기 들어서 초강대국이 된 스페인의 내리막은 1588년, 영국과의 전쟁, 1618년의 30년 종교전쟁 참전 등, 잦은 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설상가상, 아메리카 각지의 독립운동으로 돈줄이었던 식민지를 상실해 가던 와중, 1898년 쿠바 독립을 둘러싼 미국과의 전쟁에서 완패, 결국 영국보다 먼저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였던 스페인의 시대는 저문다. 세계 양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전쟁의 참화는 피했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에 의한 약 3년간의 스페인 내전, 이후 38년간의 프랑코 독재정권 시대 등 참혹한 시절을 겪어야 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은 프랑코의 사망 후, 그 뒤를 이은 후안 카를로스 1세 왕이 입헌군주제를 확립하는 신헌법을 받아들이면서다. 전쟁과 식민, 독재, 식민지 학살 등으로 피비린내 나는 스페인의 역사를 알고 나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타레가의 사랑음악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인터넷 창에서 www. 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회에서 프랑스 국가대표선수이자 주장인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이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지 않았다고 프랑스인들의 눈총을 받은 일이 있었다. 지단의 아버지는 알제리의 베르베르(BerBer)족 출신.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과거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지단은 프랑스 군대가 고국을 침탈하며 불렀을 라 마르세예즈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실상, 프랑스가 알제리 식민통치시 가한 숱한 만행을 알게 되면 예술과 문화의 나라, 유럽 최초의 인권 선언국으로 띄워진 프랑스의 치장이 벗겨진다. 프랑스 역사 초기는 로마의 침탈로 얼룩져있다. 기원전 8세기, 로마인들은 켈트족이 살고 있던 이 땅에 쳐들어와 그들 말로 갈리아라 부르며 500년 가까이 속국으로 삼았다.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세워진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 카롤링거 왕조 등을 거치는 동안 주변국을 흡수, 덩치를 키운다. 이 대제국은 자식들의 다툼으로 서프랑크, 동프랑크, 중프랑크로 삼분되는데 서프랑크는 훗날 프랑스가 된다. 이후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등 주변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도 유럽의 중심, 강국을 고수했던 프랑스는 17세기 이후, 식민지 확장과 베르사유 궁전 신축 등 재정낭비로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다. 1789년, 분노한 민중궐기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고 이후 과격파의 실각, 왕당파의 반란 등으로 혼란은 극에 치닫는다. 179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스를 다시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으나 러시아 원정실패 후 실각한다. 왕정국가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을 불러 공화국을 탄생시킨다. 20세기 들어 터진 세계대전에 휘말린 프랑스는 2차 대전 중 독일에 점령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1945년 종전 후, 유럽,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들 대부분이 식민지 독립을 인정하는 추세로 가는데 프랑스는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집착을 더 강화한다. 식민지 중 가장 가까운 입지, 천연가스 등 풍부한 자원등도 중요했지만, 그 땅에 100년 넘는 통치기간 동안 수많은 군수물자 공장, 주요 군항 등 주요시설들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1954년, 독립을 요구하는 알제리와 무려 8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국제여론의 비난, 오랜 전쟁의 피로에 못 이겨 결국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한다. 이후 프랑스, 알제리 관계는 한일간감정의 골 이상이다. 132년간의 식민통지기간 동안 프랑스는 자국민 이주를 위해 원주민을 사막으로 내쫓는 등 삶을 파괴시켰고, 8년 전쟁 중에는 200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36년간, 일제 식민통치탄압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우리를 생각하면 알제리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프랑스 국가를 부르지 않은 지단의 침묵도 이해가 간다. 북아프리카의 먼 나라 알제리에 대한 관심은 ‘Desert Rose’라는, 낯선 리듬, 낯선 언어와 목소리의 노래 한 곡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싱어송 라이터 스팅(Sting)이 1999년 발표한 앨범의 타이틀곡이었다.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알제리 출신 싱어송 라이터 쉐브 마미(Cheb Mami)였고, 낯선 리듬은 알제리 대중가요인 라이(Ria)에서 왔다. 쉐브 마미의 목소리에 빠지면서 그를 낳은 나라에 관심이 갔고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알제리의 식민 참혹사를 알게 되자 ‘Desert Rose’, 사막을 태우는 붉은 빛이 문득 핏빛으로 보였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교통요금이 무료인 나라가 있다. 버스, 기차같은 대중교통요금을 내지 않고 전국 어디든 다닐 수 있다. 룩셈부르크 얘기다. 선진국 대열에 든 우리나라에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전격 시행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교통난 때문이었다. 약 60만명의 인구가 사는 룩셈부르크는 인구 1000명당 696대의 자동차를 소유(2020년 조사기준)하고 있어 유럽대륙에서 차량 밀도가 가장 높다. 대중교통 무료화는 자동차 사용 인구를 줄이기 위한 극단 방책이었다. 인구 밀도가 아닌, 차량 밀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국민 생활수준이 높다는 이야기다. 룩셈부르크의 경제 수준은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유럽의 소강국 베네룩스’라는 소개로 익히 배운 바 있다. 현재는 그 정도가 아니라 1인당 GDP 11만5000달러의 최고수준의 부국이다. 서울시의 4배 정도 되는 2586제곱킬로미터의 작은 면적의 소국이며, 19세기 중반까지 가난한 농업국이었던 룩셈부르크. 게다가 유럽 북서부에 위치, 동쪽으로는 독일, 북쪽으로는 벨기에, 남쪽으로는 프랑스에 접해있어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이 작은 나라가 어떻게 전쟁으로 점철된 유럽역사 속에서 버텨내 오늘에 이른 것일까. 룩셈부르크 이름부터 약소국의 설움이 묻어있다. 게르만부족 중 하나인 트레베리족을 조상으로 둔 룩셈부르크의 고대사는 로마, 프랑크 왕국 등의 침탈로 얼룩져있다. 프랑크 왕국은 현재의 룩셈부르크시에 위치한 복(Bock)바위에 성채를 지어 루실르부루후스(Lucilinburhuc)라 불렀는데(고대 독일어로 ‘작은 성’이란 뜻), 여기서 룩셈부르크라는 국가명이 나왔다. 이름처럼 작은 성의 나라 룩셈부르크는 이후에도 합스부르크가,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손아귀에 놀아나야했고 세계 1, 2차 대전 때는 독일에 점령당했다. 룩셈부르크 부흥은 철강 산업이 시작이었다. 70년대, 철강 산업이 쇠퇴하자 발빠르게 금융 산업에 뛰어든다.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 세금 환경 등을 글로벌 기준 이상으로 바꾸어 런던, 뉴욕, 프랑크푸르트처럼 금융허브국으로 변신한다. 2000년부터는 ICT(컴퓨터 기반 정보기술) 산업으로 전환해 정보부국으로 자리매김하더니, 현재는 우주 자원 채굴 등 우주산업에 매진,(룩셈부르크에는 70여개의 우주산업 관련 기업, 기관이 있다) 우주 강국을 예고하고 있다. 소국이라 속전속결할 수 있는 장점을 최대치로 살려 오늘날의 위상을 만들었다. 소국의 그림자! 경제 말고는 룩셈부르크를 세상에 내세울 상징이 많지 않다. 한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누군가 ‘로자 룩셈부르크’라고 농담을 던져 함께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음악 강의를 하는 나로서는 유럽 최대 가요축제인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아일랜드에 이어 두 번째로 최다 우승자를 낸 국가로 룩셈부르크를 기억한다. (아일랜드 7회, 룩셈부르크 5회, 영국 5회) 그 중, 그리스 출신이지만 룩셈부르크 대표로 나왔던 비키 레안드로스(Vicky Leandros 1949년 그리스 출생)의 ‘사랑은 푸른 빛’(L’amour est bleu)은 자주 들었던 노래다. 67년, 제12회 대회에서 4위였던 곡이 세계적인 히트를 친 배경에는 폴 모리아(Paul Mauriat)오케스트라가 있었다. 비키의 곡을 Love is blue라는 영어명 연주곡으로 편곡해 빌보드 1위까지 올렸다. 명성과 관계없이 그 노래는 내게 60년대에 무대에 처음 선 열일곱 비키의 앳된 목소리로 저장돼 있다. 우주로 향하는 룩셈부르크는 점점 젊어지고 화려해지는 듯한데, 70넘은 비키는 이제 주름이 가득하다. 무상하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초콜릿 천국, 벨기에에 가면 손 모양 초콜릿을 볼 수 있다 화가 반 고흐의 고향인 앤트워프 지역 전설 중, ‘뱃사공의 돈을 뜯어내는 거인 안티곤의 손을 잘라 퇴치한 영웅 브라보’ 이야기가 있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초콜릿이다. 내게는 손 모양 초콜릿도, 그 전설도 섬뜩하다. 그리고 손 모양 초콜릿을 관광 상품화한 벨기에 국민성도 섬뜩하다. 선조, 레오폴드 2세(1865 – 1909)의 대학살을 생각하면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초콜릿, 와플, 맥주로 이름난, 달콤하고 고소하고 시원한 유럽 선진국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아프리카 콩고 대학살은,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에 못지않았다. 벨기에는 전쟁으로 점철된 유럽사의 희생국이었다. 벨기에 역사는 기원전 58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정벌 당한 이후 지난한 식민의 고통으로 얼룩져있다. 15세기말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16세기말에는 프랑스에, 19세기 말에는 네덜란드에, 1,2차 세계대전시 독일에 점령 당했다. 그런 벨기에 역사에 잠깐의 햇살 같은 시기가 있었는데, 1830년의 8월 혁명(프랑스 7월 혁명에 자극받아 일으켰다)으로 얻은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이었다.(1839년) 1865년, 벨기에 국왕이 된 레오폴드 2세는 유럽강국의 해외 식민전쟁에 뒤늦게 뛰어든다. 얼마 안남은 식민지 확보에 혈안이 돼, 필리핀 등 이곳저곳 찔러보던 그는 아프리카 콩고를 먹잇감 삼는다. (사악하게도) ‘과학 증진과 인도주의, 그리고 기독 문명 전파등’을 기치로 내세운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만들어 ‘박애주의자’란 가면으로 콩고에 식민 깃발을 꽂는다. 이후 본색을 드러낸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 땅의 75배에 이르는 콩고땅을 사유지화하고 고무나무로 뒤덮인 콩고 찬탈을 시작한다. 콩고인들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노동자의 아내와 딸을 감금 강간하고, 손발을 자르고, 즉결 처형하는 등 국가 전체를 피바다 만든다. 벨기에 관리들은 노동자의 손발 담은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노동자들을 겁박했다. 레오플드 2세의 약 20년간의 콩고 대학살로 콩고 인구 절반인, 1000만명이 사라졌다. 1908년 대학살 행진은 막 내렸지만, 콩고 독립은 50여 년 지난, 1960년에야 이루어졌다. 나에게 벨기에는 케이옵스(kheops)의 나라다. 낯선 이름이라면, 가수이자 배우 엄정화씨가 예전에 파우더 광고할 때 배경음악으로 나왔던 ‘아르메니안 송(Armenian Song)’을 들어보시길. 이 신비하고 몽환적인 음악은 벨기에 출신 작곡가 애릴로리가 주축이 돼 캐나다, 프랑스, 스페인, 대만, 영국, 미국 등 여러 아티스트와 함께 만든 프로젝트 그룹의 작품이다. 케이옵스란 이름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름에서 따왔다. 애릴로리는 ‘케이옵스의 꿈은 서로 다른 문화배경을 가진 여러 나라의 아티스트들이 음악 교류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것’ 이라고 한다. 벨기에 국민들은 현재도 레오폴드 2세를 건축왕으로 떠받들며 위인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다는데 (교육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 애릴로리도 그럴까? 케이옵스 음악 중 가장 좋아하는 집시 파워(Gipsy Power)를 듣는데, 오늘은 카카오 함류량 높은 초콜릿보다 더 쓰게 들린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소년은 통창 앞 의자에 혼자 앉아있다. 책을 떨군 것도 모른 채 한 시간 넘도록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창 너머 하늘을 찌르고 선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무 사이에 걸린 구름일까, 나무들 뒤 주차장을 오가는 차와 사람들일까. 소년의 시선을 이끈 것은 마음, 영혼, 무의식같은 그의 내면일 것이다. 어린 날, 그가 점령했던 왕국의 일용할 양식이던 것들. 웃음소리와 고집과 도발로 융성했던 그 아름다운 나라를 찬탈한 이는 누구였을까. 소년은 최근 자퇴한 고교 2년생이었던 내 아들이다. ‘멍 때리고 있던 아들’ 그 아들의 뒷모습에 감동해 ‘멍 때리고 있던 나’, 모자(母子)의 생경한 모습은 어제 헤이리 내 작업실에서의 실황이고. 입시지옥에 영육이 말라가는 것을 보다 못한 남편의 권유가 시작이었고 아들의 빠른 수용으로 일사천리 결정된 자퇴 후, 한 달이 지났다. 아들은 다시 깔깔 웃기 시작했고, 말이 많아졌고, 없었던 애교(?)까지 부린다. 숙제와 시험에서 해방돼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아들 뒤에서 난데없이(물론 동의했지만) 그의 삼시세끼 해결이라는 숙제와 시험을 받은 나는......소리도 못내는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키우며 한숨과 함께 튀어나오곤 했던 말이 더 잦아졌다. ‘아,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덴마크 같은 나라’ 할 때 제일 먼저 ‘국민 행복지수 세계 최고’를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덴마크를 상징하는 바이킹, 레고, 동화 작가 안데르센 등이 행복나라에 환상을 더한다. 아이 둘 키우면서 인간성장에 고민이 깊었던 나는, 덴마크하면 그룬투비(N.F.S Grundtvig)를 빼놓을 수 없다. 시험 없고, 학원 없고, 입시지옥 없다는, 그 꿈같은 덴마크 학교의 초석을 놓은 이가 그룬투비다. 그룬투비가 덴마크 교육에 혁신을 일으킨 시기는 안데르센이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썼던 시기다. 19세기의 덴마크는 실제 소년, 소녀들이 학교는커녕 빵 값을 벌기 위해 거리를 떠돌던, 전국민이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다.(성냥팔이 소녀의 모델은 안데르센 어머니다) 목사였던 그룬투비는 암울한 덴마크를 일으켜 세울 힘은 교육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선택된 소수만 다닐 수 있었던 학교 제도 , 그 교육도 ‘교사의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라는 것이 반기를 들고 ‘폴케호이스콜레’라는 신교육기관을 만들었다. 우리 말로 ‘평민대학‘ ’자유학교’ 정도의 의미인 폴케호이스콜레에는 성별, 연령, 계급, 종교에 관계없이 입학할 수 있게 했고 경쟁과 이기심을 부르는 시험을 없애고 공동체 프로그램을 강화했다. ’경쟁보다는 협동’ ‘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행복’을 중요시한 폴케호이스콜레의 교육철학은 그대로 이어져 오늘의 덴마크 공교육을 꽃피우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오늘 아침도 도서관에 간다는 아들을 위해 두 개의 도시락을 싸면서 부모에게 이 고생을 시키지 않는 덴마크 교육을 부러워한다. 아니, 질투한다. 기막히다. 이 와중에 월드뮤직 채널에서 덴마크 작곡가 자콥 게이드(Jacob Gade) 작곡의 탱고곡 ‘Jealousy(질투)’가 흐른다. 이런 걸 동시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나의 과한 감정이입인가.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에든버러는 꼭 가세요’ 젊은 날, 첫 해외여행인 유럽 배낭 여행을 앞둔 내게 영국 유학파 방송사 PD가 권했었다. 마음에 담았지만 일정상 무리였기에 ‘다음 기회에 꼭!’ 이라는 미지의 목록에 끼워 두었다. 그리고 20년 넘게 흘러버렸다. 아, ‘다음 기회에 꼭 ’의 목록에 담긴 채 회한의 십자가를 단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10월 중에 유럽 여행을 갈 예정인데 앞뒤 재지 않고 제일 먼저 ‘에든버러’를 집어넣었다. ‘지금 못하는 것은 영원히 못할 것이며 다음 번이라는 것은 없다’는 쓸쓸한 삶의 섭리를 깨달았기에.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의 수도다. 스코틀랜드 하면 보통, 킬트(티탄이라는 체크무늬 남성용 치마), 백파이프, 스카치 위스키 등을 떠올리는데 월드뮤직 강사인 내게 이 나라는 졸업식장에서 부르는 ‘석별의 정’의 원곡이자 갑오개혁 직후 우리 애국가 멜로디였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나라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로 시작되는 노래. 원곡 ‘올드 랭 사인’의 뜻은 스코트어로 ‘오랜 옛날부터’ ‘그리운 옛날’의 정도의 뜻. 우리가 부르는 ‘석별의 정’은 헤어짐을 슬퍼하는 노래인데 본국에서는 ‘재회의 감격을 기뻐하는’ 노래로 불린다. 오래된 인연을 어찌 잊을까/ 어찌 떠올리지 않을 수 있나/ 오래된 인연, 오래된 날들/ 어쩌 잊을 수 있으랴/ 오랜 옛날부터 내 사랑아......중략...... 내 사랑하는 친구야/ 그 손이 저기 있으니/ 손을 뻗어 맞잡자꾸나/ 유쾌한 술잔을 함께 하니/ 오래된 옛날을 위해 작사자는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로 구전민요에서 영감을 얻어 시를 쓴 것이 가사의 바탕이 됐다. 거기에 작곡가 윌리엄 쉴드(William Shield 1748-1829)가 곡을 더해 노래가 탄생 되었다. 로버트 번스는 스코틀랜드 민중이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울 때 시와 노래로 위로와 용기를 준 국민 시인이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가 하나 되기까지 전쟁의 도가니였다. 잉글랜드는 기원전 55년, 로마의 침입으로 410년까지 로마제국 지배를 받았고 이후 게르만족 분파 앵글로-색슨족, 바이킹족 침입 등에 시달리다 9세기 초 노르망디 공국에 정복되고 만다. 전쟁의 피로 적셔진 피해국, 잉글랜드는 이웃나라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향해 분을 풀었다. 하나의 나라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침략하고 약탈하고 괴롭혔다. 1536년 웨일즈 합병, 1707년 연합법 제정으로 스코틀랜드 합병, 1801년 북아일랜드 합병으로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으로 통합되었지만 북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는 우리가 일본에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앙금이 남아있다. 2014년 독립을 위해 ‘분리독립 투표’를 실시한 스코틀랜드의 경우, 반대가 더 많아 부결되었지만 올해 다시 투표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영미 팝송을 월드뮤직의 전부로 알고 자란 사춘기 때, 영어가사 노래를 들으면 영미권 가수겠거니, 짐작했다. 제랄드 졸링(Gerard Joling)의 티켓 투 더 트로픽(Tiket To The Tropics)을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다. 노래 분위기가 딱 미국 팝송이었는데 알고 보니 네덜란드 노래였다. 노래에 빠져든 건 졸링의 목소리와 가사 때문이었다. 조관우 목소리의 서양버전이랄까, 남성 같지 않은 미성이다. 조관우는 가성으로 내는 목소리라던데 졸링은 본목소리란다. 화려하면서도 달콤하고 쓸쓸하다. 가사는 ‘사랑 잃은 자가 연인에게 마음으로 쓰는 편지’ 라 할 수 있는데 시 같다. 홀로 앉아 있는 이곳은 추워지고/아침 비는 유리창을 때리고 있어요/ 날씨는 온통 춥고 흐리네요/ 마음 속에 생각의 나래를 펴요/ 나는 열대의 섬으로 가려해요/ 나를 늘 몽상가라 불렀던 당신/ 내게 걸림돌이 되었던 당신/ 열대로 가는 차표를 한 장 사겠어요/ 혼자 되어 이곳을 뒤로하고 떠나렵니다( 후략) 사랑 잃고 고통에 빠진 이의 행로가 대단히 활동적(?)이다. 대개 실연 가사의 주 레퍼토리는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은둔형, ‘담배 연기에 고독을 날리고 술로 쓰린 속을 긁어 이열치열하는’ 학대형, ‘정처 없이 길을 헤매는’ 방황형(헤매봐야 동네일 듯) 등이다. 가사의 내용을 유추하면 반경 10킬로 밖은 나가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졸링의 노래 속 인물은 사랑을 잊기 위해 열대섬으로 가는 차표를 사려한다. 사랑도 실연도 대륙적이다. 졸링의 나라 네덜란드라 그런가, 하는 억측이 든다. 네덜란드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에 세계를 주름잡던 해운강국이었다. 기원전 6500년경, 켈트족이 살았던 네덜란드 역사는 기원전 50년경의 로마 침입을 시작으로 프랑크 왕국,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의 강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 받았던 약소국의 역사다. 이 작은 나라가 어떻게 16세기 후반, 북방무역의 70%를 휩쓸고 전 유럽보다 많은 상선으로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했던 무역대국이 된 것일까. 대개 모직공업과 청어산업이 잘돼 급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배경에는 유대인의 두뇌가 있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을 가장 많이 받아준 곳이 바로 네덜란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스페인은 전쟁포상금 마련을 위해 부유한 유대인의 재산을 빼앗기로 하고 ‘카톨릭 신앙에 해악을 주었다’는 명목으로 추방) 유대인들은 ‘플류트’라는 특수 화물선을 개발, 발전시켜 해양무역왕국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고 나아가 최초의 증권거래소, 최초의 은행을 네덜란드에 세워 금융왕국을 만든 주역이기도 했다. 16-17세기 네덜란드 융성의 중심에 유대인들이 있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유대인들에게 문을 활짝 연 네덜란드의 개방성이 유럽역사를 바꾼 것이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여름 휴가로 찾은 강원도 양양의 풍경은 이색적이었다. 서핑족들의 성지라는 정도는 알고 갔지만 그들이 문화를 바꿔놓은 줄은 몰랐다. 횟집이 즐비할 거리의 서핑숍과 패스트푸드점, 카페 등도 낮설었느데, 밤이 되자 바닷가를 조명과 음악, 춤으로 밝힌 비치클럽 청춘들의 모습은 흡사 외국 휴양지 느낌이다. 웃통 벗은 사내들의 문신, 칵테일 잔 들고 춤추는 비키니 차림 여성들의 분방한 모습이 나의 ‘촌스러운’ 20대 기억을 소환했다. 20세기에 청춘을 보낸 내게 ‘바닷가 청춘’을 상징하는 것은 기타와 모닥불, 새우깡 안주, 그리고 단골 레퍼토리 0순위였던 연가(戀歌).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저 바다 넘어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빛도 아름답지만/사랑스런 그대 눈은/ 더욱 아름다워라.....(후략)’ 새우깡을 건네며 스치는 손 끝에 가슴 떨려하면서도 쓴 소주에 사랑고백을 삼켰던 것이 내 청춘의 연가였다. 그 노래가 내 나라 노래가 아닌, 뉴질랜드 전통 민요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람은 양양의 밤 문화 이상이었다. 그 노래로 인해 그저 북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복지천국, 낙농업 친환경 국가 정도로 알고 있던 뉴질랜드 역사의 그림자를 알게 됐다. ‘뉴질랜드 전통 민요’라고 할 때 전통은 무엇인가. 백인의 나라라고 인식된 뉴질랜드의 원주민은 1200년 이후, 폴리네시아에서 건너온 마오리족이다. 마오리족의 평화는 17세기 중반, 이 땅에 발을 디딘 네덜란드 탐험가 아벨 타스만,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등을 시작으로 흔들리며 결국 제국들의 놀잇감이 됐다. 1840년, 영국은 마오리족에게 그들의 신변, 토지 소유권을 보장해주겠다는 ‘와이탕이 조약’으로 꼬드겨 사실상 식민지로 만든다. 이후 급증한 유럽 이민자들이 옮긴 전염병과 그들의 토지강탈에 맞서 벌인 전쟁으로 마오리족 인구는 급감하고 문화는 쇠한다. 1970년, 대영제국 내 자치령이 된 뉴질랜드는 1931년, 자치정부 수립, 1947년, 자치국 정식 인정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른다. 현재 뉴질랜드 인구는 파케하라고 부르는 유럽계 백인이 60% 이상이고 원래 땅의 주인이었던 마오리족은 15% 정도. 미국의 인디언처럼 마오리족 역시, 관광객들에게 전통춤 ‘하카’ 등 전통문화를 팔며 2등 국민으로 살고 있다. 우리가 ‘연가’라고 알고 있는 마오리족 노래 ‘포카레카레아나(Pokarekareana)’는 마오리족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북섬 로토루아 호수 근처에 살던 족장은 딸이 미천한 청년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고 만나지 못하게 카누를 빼앗는다. 청년은 매일 밤 구슬프게 피리로 연가를 불렀고 그 피리 소리에 미친 딸은 청년이 사는 섬까지 헤엄쳐가 사랑을 불태웠다. 이를 알아챈 족장은 결국 그들의 결혼을 허락했다는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과 달리 해피엔딩이다. 마오리족 전설을 품은 이 노래는 1914년 투모안(Tomoan)의 편곡, 마오리족 출신 가수 키리 테 카나와(Kiri Te Kanawa)의 목소리로 세상에 나온다. 우리에게 흘러든 것은 한국전쟁 때 참전한 뉴질랜드군에 의해서였는데, 속설에 의하면 참전용사 중 가장 용감하게 마지막까지 싸운이들이 마오리족 출신들이었다나. 진위를 떠나 슬프게 들린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가수, 카리 브렘네스 (Kari Bremnes)의 베를린의 사랑( A Lover in Berlin)을 들으며 신문을 보고 있는데 노르웨이의 연례 행사에 대한 토막기사가 눈에 띈다.(카리 브렘네스의 목소리가 만든 고적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날아간다) 노르웨이인들은 연례로 ‘대구 혀 자르기’ 행사를 하는데 주어진 시간 2분내 대구 혀를 뼈 없이 가장 많이 발라내는 이에게 상을 준단다. 참가 연령은 13세 이하. 어린이판 몬도가네 느낌이라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문화 차이로 돌린다. 노르웨이 하면 대개 인형의 집 작가인 헨리크 입센, 절규의 화가 에드바드 뭉크, 페르귄트 모음곡으로 유명한 에드바르 그리그를 떠올리고 스웨덴 핀란드와 묶어 북유럽 지상낙원이라고 부러워한다. 그런데 노르웨이는 무엇 때문에 부국이 됐을까? 100년 전만해도 척박한 땅, 적은 인구 등으로 고생하던 농업국가였다. 오늘날 스웨덴은 이케아와 H&M, 볼보, 스카이프, 에릭손, 일렉트로룩스 등을 내세우고 핀란드는 (노키아는 지는 노을이 됐지만) 게임계의 슈퍼스타 슈퍼셀과 로비오, 그리고 모바일 운영체계 안드로이드 기반인 리눅스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상징기업도 없는 노르웨이가 어떻게 1인당 국민소득 10만 달러가 넘는, 북유럽 최고 부국이 됐을까? 석유 때문이다. 50년 전인 1969년, 노르웨이와 면한 북해에서 엄청난 양의 원유가 쏟아졌다. 스웨덴, 핀란드도 천연자원부국이지만(스웨덴은 철광석, 핀란드는 질 좋은 목재) 오일 머니와 는 비교 불가. 게임 끝이다. 나라 곳간만 그득한 게 아니다. 부자나라의 병이라는 고독,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률이 OECD 5위권에 들어 심각한 사회문제였으나 1990년, ‘프로작’ 같은 항우울제가 시판되면서 현격히 개선됐다. 올해 우리의 자살률은 여전히 OECD국가 중 1위인데 노르웨이는 15위이다(2022.2월/Health Data/OECD제공) 가장 부러운 건 젊은이들이 남과 비교 없이, 열등감 없이 꿈을 좇을 수 있는 사회기반과 인식이다. 30프로가 고등학교 졸업을 안해도, 70프로가 대학을 안가도, 루저가 되지 않는 나라다. 입시와 취업과 혼수 마련 걱정 없는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카레 브렘네스의 목소리와 노래가 답을 한다. 애태우지 않고 속 끓이지 않는 목소리로 ‘사랑을 하면 아이처럼 빠져들고 천국과 지옥의 끝까지 가보라. 그게 사랑한다는 것이다’고. 한때 베를린에서 연인을 만났어/ 옆 테이블의 연약한 노파가 말했어/ 그의 목소리가 오래된 바이올린 같다고 그리고 말했어/ 그 목소리, 목소리/ 사람들은 그걸 남자에게 빠져드는 거라고 하네/ 하지만 이 추락은 내게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아오르게 했네 / 말도 안돼, 아무 계획도 없어/누가 이 열정을 마른 땅의 안전과 바꿀까/ 나도, 그도 아니야 (후략) 이 나라에 ‘사랑의 지옥과 천국을 끝까지 가볼 수 있을 여유 있는 청춘’이 얼마나 될까. 창밖으로 심야 배달하는 오토바이 소리에 괜히 가슴이 아려온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팔순을 맞은 외삼촌이 가까운 친지들을 모아 식사 대접을 했다. 식사 후, 술잔이 몇 번 돌자 취기에 오른 외삼촌이 가족을 불러내 애정과 고마움을 전한다. 의례적이면서도 늘 뭉클한 ‘사랑의 가족’ 모습인데 지켜보는 이들의 표정이 복잡하다. 부부 갈등으로 인한 수 차례의 이혼 위기, 자녀들의 가출 등 쉬쉬해도 소문 돈 지난한 가족사를 떠올렸기 때문 아닐까 싶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 한 곡조를 뽑겠다’는 삼촌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노래일) ‘아, 목동아’를 부른다. ‘산골짝마다 울리는 목동들의 피리 소리’로 시작되는데, 무한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유한한 남녀간의 사랑을 애달파하는 초원의 사랑가다. 삼촌 연배의 분들은 현재명 작사, 작곡의 우리 노래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실은 영국 옆 섬나라 아일랜드의 민요다. 아일랜드인들은 한 서린 자신들의 노래가 지구 반대쪽에서 ‘사랑타령’으로 바뀌어 불린다는 것을 알면 뭐라고 할까. 아일랜드는 700년 넘게 영국 식민지로 있던 나라다. 1916년, 분리 독립 선언하고 봉기한 아일랜드에서는 수많은 청년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쟁터로 달려갔다. ‘아, 목동아’의 원곡 ‘오, 대니 보이’는 어린 아들을 전쟁에 보내는 늙은 아버지의 유언을 담은 곡이다. 오 대니 보이, 백 파이프 소리가 부르고 있네/ 골짜기로, 그리고 산마루를 따라 들려오네/여름은 가고 장미꽃도 지고 말았다/ 너는 가고 나는 슬픔을 견뎌야 한다......중략......오, 대니 보이, 난 널 사랑한다/ 만약 네가 온다면, 모든 꽃들이 지고 있을 때, 난 죽었고, 죽었다고 해도 너는 와서 내가 누워 있는 곳을 찾아라......후략...... ‘오 대니 보이’의 노랫말을 만든 이는 프레데릭 에드워드 웨덜리(Frederic Edward Weatherly)라는 영국 변호사 겸 작곡가. ‘오 대니 보이’는 아일랜드의 구전곡이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민요 수집가인 제인 로스(1810–1879)에 의해 ‘런던데리 에어(Londonderry Air)’라는 피아노곡으로 악보화 된다. 제인 로스는 이 곡을 어느 날 창밖에서 들려온 집시풍 바이올린 소리로 만났다고 한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이 곡에 가사를 붙여 만들어진 노래가 퍼져나갔다. 전쟁의 비극을 담은 ‘오! 대니 보이’도 그중 하나다. 제인 로스가 노래 제목으로 붙인 ‘런던데리 에어’의 런던데리는 ‘오! 대니 보이’ 보다 더 참담한 역사를 품고 있는 지역명이다. 19세기 중엽 , 감자 대기근으로 아일랜드 국민 200만명 이상이 굶어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신대륙 아메리카로 대거 떠났는데 그 이민선을 띄우던 항구가 런던데리에 있었다. 외삼촌의 ‘아! 목동아’가 외삼촌의 전쟁같은 가족사를 품고 있어 가슴 아렸는데 원곡 ‘오! 대니 보이’를 들으니 전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50석 예정으로 만든 작은 음악회 입장권이 일주일도 안돼 동나버렸다. 100석도 안 채워지면 어쩌나 해서 다각도로 마련했던 한 달 홍보 총력전이 기분 좋게 무색해졌다. 일반적인 공연장이 아니라, 관객석을 급히 두 배 이상 늘릴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음악회를 100회 가까이 기획해오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6월 18일 열렸던 ‘2022 아마니 페스타(Amany Festa)’이야기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 문화계가 신음하고 있는 판에 경기도, 그것도 최북단, 그것도 시골 산속의, 이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한 조각가의 작업장의 페스타(축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마니 페스타는 작업장이 아마니 삼거리 인근인 데다 아마니가 아프리카 스와힐리 어어로 평화라는 뜻이라 조각가의 작품 주제 ‘사랑과 평화’와 상통돼 정한 이름이다) 지난해 늦여름, 예술가의 인터뷰 일로 찾았던 경기도 전곡, 조각가 김창곤의 작업장.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국내 최초, 유일한 ‘거석 조각가’라는 소개로 찾았는데 기대와 상상 이상이었다. 멧돼지, 고라니 뛰어다니는 산속, 4천 평의 흙바닥 작업장에 전국에서 모은 100여 점의 거석들이 희귀한 장관을 연출했다. 사람 키 일곱, 여덟 배가 되는 거석과 조각품들이 저마다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인터뷰 후 서울의 각계 예술가들과의 모임이 있었는데, 김창곤 조각가와 그 작업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 즉시 방문단(?)이 결성됐고, 일주일도 안돼 하프 연주자, 무용가, 화가 등 7인 예술가들의 방문이 이어졌고, 그 자리에서 김창곤 조각가의 ‘70 평생 조각 투혼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결정되었다. 말은 멋있지만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예술가들이 거석 작품에 취해(?) 급 기획한 내용을 보라. ‘산속에 세대의 하프를 놓고 타악, 바순 협주에 무용, 먹 드로잉 쇼까지 곁들인 융합 음악회’ 라는데, 어떻게 산속에서 (우천 시에는 각종 조각 도구들과 땀내로 쩐 대형 천막 작업장 안에서) 가능한 일인가. 놀랍게도 예술가들의 ‘작업장 즉석 결의’를 끌어낸 것은 다름 아닌 그 경험하지 못한, 불편한 ,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조건들이었다. 평생 화려하고 넓고 쾌적한 실내 공연장에서 연주해온 예술가들은 땀내 전 작업장을 배경으로 맨 흙바닥에서,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를 감내해야 하는 무대에 오히려 도발됐다. 조기예약마감을 부른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과 기대도 예술가들과 같은 지점이었다는 것을 공연 후 알게 됐다. 그들은 늘 가던 공연장, 늘 보던 프로그램에 식상해 있었다. 공연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연주도 슈베르트나 드비쉬의 작품 같은 정통 클래식 연주가 아닌, 아스투리아스, 스페니쉬 댄스, 하바네라 등의 스페인 춤곡이었다. 전국 대로(大路)의 목 좋은 장소에, 내리기 무섭게 바꿔다는 ‘ 외국 유명 클래식 연주자의 세계 순회공연’이나 ‘ 외국 유명 클래식 콩쿠르 입상자 공연’ 등의 플래카드를 보면 가끔 씁쓸하다. 월드뮤직 공연이 눈에 띄게 걸린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예술의 수원(水源)은 다양성 아닌가. 사람들은 가끔 대로가 아닌 골목길을 가보고 싶어 한다. 골목길의 가게, 골목길의 사람들, 골목길의 사연들이 마음을 끌고 가슴을 두드리는 그 경험들에 목마르다. 2022 아마니 페스타 공연에 몰려든 관객들이 그걸 말해준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어리고 예쁘고 춤 잘 추는 걸그룹에 점령된 지 오래인 방송에 노인의 노래가 장안의 화제다. 시니어들이 노래로 인생을 들려준다는 취지의 방송인데 (JTBC ’뜨거운 싱어즈’) 유독 85세 배우 김영옥 씨의 ‘천 개의 바람이 되어’와 82세 배우 나문희 씨의 ‘나의 옛날이야기’가 심장을 두드린다. 나이 든 목소리는 불안했고 발음, 음정이 엇나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집중하게 하고 콧날을 건드리더니 종내 눈물을 떨구게 한다. 라디오 프로그램이라도 그랬을까. 노년의 배우는 마이크 쥔 주름진 손으로, 뜨거운 것이 빠져나간 눈빛으로, 굽은 등으로...... 노래가 아닌, 80년 인생을 전했다. 그게 심금을 울렸다. 월드뮤직 가운데 가수의 삶을 알고 나서 좋아지는 노래들이 있다. 에디트 피아프(1915-1963)의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는 대단한 월드뮤직 명곡이지만 목소리가 내 취향이 아니고 노래, 음률, 가사도 마음에 와닿지 않아 즐겨 듣지 않았다. 에디트 피아프의 실제 삶을 담은 2008년 개봉영화(올리비에 다한 감독) ‘라비앙 로즈(장밋빛 인생)’를 보기 전까지는. 에디트 피아프의 삶은 장밋빛이 아니었다. 1차 대전 중, 프랑스 변두리 지역 베르빌에서, 서커스단 곡예사와 장터 가수의 하룻밤 사랑으로 태어난 피아프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분유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가난은 열 살 키에서 성장을 멈추게 했고 엄마처럼 어린 나이에 장터 가수로 살게 만들었고 열다섯 나이의 미혼모가 되게 했다. 그렇게 태어난 피아프 인생 유일한 자식은 뇌수막염으로 두 해를 못 넘기고 죽고 만다. 그 삶에서 만들어진 목소리가, 노래가 어떠했겠는가. ‘한 세상 다 돌고 온 듯한’ 장터 소녀의 목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여행자 루이 레플리는 파리 레스토랑 무대가수로 데뷔시킨다. 거짓말 같은 행운은 계속 이어져 그녀의 목소리에 반한 음악가 레몽 아소, 시인이며 극작가인 장 콕토 등의 도움으로 피아프는 물랭루즈 무대의 스타가 된다. 사랑도 얻는다.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찾아온 수려한 이탈리아 청년이었다. 피아프는 애인을 영화계에 데뷔시켜주었고 무명의 청년은 인기를 얻는다. 그가 바로 샹송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부른 배우이자 가수 이브 몽탕. 그러나 대스타가 된 이브 몽탕은 변심한다. ‘라비앙 로즈’는 이브 몽탕에게 버려진 피아프가 실연의 고통 속에서 직접 노랫말을 지어 나온 노래다. ‘내 시선을 내려놓는 눈동자/ 입술에 머물다 사라지는 미소/이게 바로 내 사랑의 초상화/ 그가 나를 품에 안고 속삭일 때면/인생은 온통 장밋빛/그가 내게 사랑의 말을 할 때/ 늘 하는 가벼운 말이라도 나를 행복하게 하네......’ 실연의 치유책은 새로운 사랑이었다. 미국 카네기홀 공연 시기 만난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 또 불같은 사랑에 빠졌으나 이번엔 비행기 사고가 사랑을 추락시킨다. 그 충격으로 실어증까지 걸린 피아프, 그 고통은 또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낸다. ‘사랑의 찬가’ 사랑의 찬가의 노랫말도 장밋빛 눈부시고 장미향 가득하다. 마르셀 세르당 이후 찾아온 사랑, 두 차례의 결혼 모두 비극으로 막 내리는데 이후 술과 담배에 절어 살던 피아프는 48세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부모도 첫사랑도 첫아이도..... 생애 모든 사랑이 그녀를 버렸으나 죽는 날까지 장밋빛 사랑을 꿈꾸었던 피아프의 노래는 참으로 애달픈 인생 찬가다. 삶과 사랑의 벼랑 끝에 서본 적 있는 자, 어찌 그녀의 노래를 외면할 수 있으리.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리스본에 있으면서 리스본을 그리워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면 포르투갈 민속 음악 인 파두 그룹, 마드레데우스(Madredeus)의 음반을 들어보시길’ 소설가 김연수 씨의 신문 칼럼에서 처음 ‘마드레데우스’를 알게 됐다. 7년 전 이야기다. 한 번 찾아서 들어봐야지, 하다 잊어버린 그 이름을 얼마 전 영화잡지에서 다시 보게 됐다. 빔 벤더스를 다룬 기사였다. 빔 벤더스는 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1999)’으로 쿠바 음악의 매력을 세상에 알리고 ‘파리 텍사스(1987)’ ‘베를린 천사의 시(1993)’로 각각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 감독상을 받아낸 올해 나이 77세의 독일 거장. 잡지 기사에는 감독이 미치도록 좋아했다는 포르투갈 음악 그룹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름이 마드레데우스였다. 그들의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영감을 얻어 영화로 만들었고 그 영화에 그룹을 출연시키기까지 했다나. 그렇게 탄생한 영화 ‘리스본 스토리(1994)’는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해 존재감 없이 막 내렸다고 한다. 국내 상영이나 했던가. 빔 벤더스를 좋아해 그의 초기작까지 뒤져 찾아봤던 나였지만 ‘리스본 스토리’는 기억에 없다. 그래도 ‘무려’ 빔 벤더스인데! 유물 발굴하는 심정으로 거의 30년 전 영화를 찾아보았다. 소설이 작가의 자서전이라면 영화는 감독의 인생필름일 수 있겠다. ‘리스본 스토리’는 영화에 대한 감독의 철학을 녹인 자전적 내면 스토리로 보였다. 독일에 살고 있는 영화 사운드 엔지니어 필립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영화 촬영 중인 친구를 찾아간다. 그런데 가는 도중 타이어 펑크 등, 재수 없는 일이 연발하더니 도착 후는 점입가경, 제발 와달라 청해 그를 고생길로 끌고 온 친구가 연락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 낡고 지저분한 숙소의 밤은 모기에 뜯겨 환장하겠고 낮에는 시끄러운 동네 꼬마들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그런데 가난한 동네의 우중충한 분위기가 프리드리히의 영화 음악을 맡은 그룹 ‘마드레데우스’의 등장으로 확 바뀐다. 신기한 일이다. 숙소의 얼룩, 빨래 널린 너저분한 건물, 스산한 골목이 리스본의 오랜 역사를 품은 비밀 무늬로 화하고 캠코더 들고 설치는 동네 꼬마들의 소음은 영화 본질에 관한 철학적 질문으로 들린다. 영화 후반부에야 모습 드러낸 친구 프리드리히의 비정상적 행각도 창작의 진지한 찰나로 보인다. 쿠바의 낡은 도시, 죽음만이 휴식일 듯한 늙은 노동자들을 숭고한 예인으로 만든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속 음악들처럼 ‘리스본 스토리’의 마드레데우스 음악들은 리스본의 초라한 동네와 빈민들을 세상에 없는 영화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비한 장소로 만들었다. 영화 개봉 후 ‘리스본 스토리’는 잊혀졌지만 ‘마드레데우스’는 명성을 얻었다. 파두의 정서 사우다드(Saudad/ 그리움, 향수에 절여진 애상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한(恨)의 정서와 비슷)가 배어있으면서도 끈적임 없이 청아한 보컬 테레사 살게이로(Teresa Salgueiro)의 목소리, 그리고 파두 악기인 기타에 첼로, 신시사이저를 가미해 팝적인 리듬을 낸 마드레데우스의 음악은 포르투갈을 넘어 전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영화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 ‘알파마(Alfama)’는 리스본에 속한 파두 공연장 많은 지역명인데 마드레데우스가 월드 스타가 된 후 관광명소가 됐다. 알파마를 들으면 ‘리스본에 가보지 않고도 리스본이 그리워지는’ 감정을 느낀다. 영화 속, 음악 한 곡이 먼 나라 낯선 도시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까지 한 출판사와 음반회사 공동으로 한글날 맞이 ‘시인들이 뽑는 아름다운 우리 노랫말’ 행사를 했다. 가수의 목소리, 아름다운 음률도 덮어버리는 기막힌 노랫말들을 알게 되고 음미했다. 선정 가요 중에 나의 애창곡 ‘김광진의 편지’가 들어 있어 더욱 그 행사에 마음이 갔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선정 가요들을 모아 낭송하고 노래를 들려주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월드 뮤직 정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고 그 ‘세상’에는 당연히 우리 노래도 들어있으니까. 영화 배경음악 중 시 같은 노랫말이 있다. 그럴 때는 정지화면을 누르고 음미한다. 샐리 포터(Sally Potter)가 부른 ‘I Am You’도 그랬다. 그 노래는 음반을 통해 먼저 만났다. ‘영화 속의 월드뮤직’이라는 타이틀로 나온 음반이었고 수록곡들은 모두 아는 음악이었는데 ‘영화 탱고 레슨의 I Am You’는 생경했다. 음악을 틀면 바로 혈관에 독한 기운을 주입하는 탱고리듬이 터진다. 그리고...... 뭐랄까. 초탈한, 인생을 한 바퀴 돌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듯한 목소리로 ‘Where did you come from?’이라고 나지막이 묻는다. 탱고 리듬 독이 온몸에 금세 번진다. 이어지는 노랫말들이 테킬라 한잔을 권하더니 손을 잡고 일으켜 어느새 남미의 무도희장으로 데려간다. 앞에는 눈빛 강렬한 남미 사내가 서 있다.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 땅에서, 물속에서, 아니면 불 속에서, 아니면 공기 속에서 왔는지/춤출 때 확실히 느껴져요/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아온 느낌/여행자여 / 내 마음 속 사내여/무대 위의 사내, 예술 그 자체인 사내/ 스텝으로 바로 말 거는 그대/나는 당신을 듣고 바라보아요...... 중략...... 당신은 나, 그리고 나는 당신/ 하나는 하나, 그리고 하나는 둘/ 당신은 나 그리고 나는 당신 음반 속에 소개된 영화, 탱고 레슨을 바로 찾아보았다. 영화 제목이 준 힌트, 그리고 노랫말 느낌만으로 ‘탱고에 미친 강렬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예상했는데 멀리 가지 않았다. 헌팅을 위해 파리에 온 영국 시나리오 작가 샐리는 우연히 탱고 무대를 보고 빠져 춤을 배운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시나리오 작업, 영화 제작자들의 상업성에 대한 분개로 영화작업은 좌초되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탱고 레슨. 탱고의 고장 아르헨티나 댄서인 선생 파블로는 탱고를 추려면 힘부터 빼야 하고, 상대를 믿어야 하고, 오직 현재만 생각해야 된다고 일러준다. 탱고 레슨이자 인생 레슨. 뇌만 쓰고 살아온, 겨울나무처럼 건조하고 까칠했던 나이 든 작가의 죽은 세포들이 회생한다. 물같고 불같고 공기같은 여인으로. 영화는 탱고에 미치고 사랑에 미쳤던 감독 샐리 포터, 자신의 이야기다. 그래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하고 여주인공 이름도 샐리로 썼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타오르는 ‘I Am You’ 도 감독이 노랫말을 쓰고 부르기까지 했다. 영화는 어떤가, 묻는 이에게 이렇게 답한다. 감독 샐리 포터를 영화 속에서 만나고 영화 속 탱고댄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권하고 싶다고. 아, 무엇보다 I Am You!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먼 나라의 낯설지만 가슴 뛰는 음악. 월드뮤직을 수식할 때 쓰는 말 중의 하나인데 서양 클래식 중에도 종종 그런 음악이 발견된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아르보 패르트(Arvo Part)의 음악이 그 예. 그의 음악을 알게 된 건 10년 전, 한 바이올리니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다. 첫인상도 말투도 까칠하게 느끼게 한 그녀는 자주 연주하는 곡을 묻자 ‘ 나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이런 거 지겨워요. 나 정도 되는 연주자면 아르보 패르트같은 걸 해야지’라며 자신감과 오만함을 넘나드는 눈빛을 보였다. 끝까지 유쾌하지 않았던 인터뷰의 기억은 이후 그녀의 연주회에서 들은 아르보 패르트 연주(Fratres: 형제들) 한 곡으로 반전됐다. 쇤베르크, 프로코피에프, 바르톡같은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이 감정을 두드린 경우가 드물었는데 처음부터 심장으로 직진한 아르보 패르트 음악은 충격이었다. ‘영적 미니멀리즘’이라는 그의 음악에 붙는 생경한 찬사는 그가 중세 그레고리안 성가, 르네상스 종교음악에 심취했고 독실한 러시아 정교 신자라는 배경을 알면 이해가 간다. 영성의 길은 또한 침묵의 길일 터. 그의 작곡의 변에 ‘음악은 음 하나가 아름답게 연주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종소리의 여운처럼 남는다. 실제 두 가지 악기, 혹은 두 가지 소리만 낸다는 그만의 작곡법 ‘틴티나불리’는 라틴어로 ‘종들’이라는 뜻이다. 음 하나하나의 오랜 울림, 여백, 침묵을 오가는 그의 음악을 들으면 절로 눈이 감기고 다른 세상으로 뜨는 듯한 감정의 유체이탈을 경험한다. 아르보 패르트의 북채는 너무 시끄러운 세상에서 너무 고독하게 사는 현대인들의 심장을 두드렸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배경으로 쓴 영화가 50편이 넘는다. ‘어바웃 타임’같이 유명세, 호평을 받은 작품의 반대편에 있는 마돈나 출연의 영화 ‘스웹트 어웨이(Swept Away)’를 소개한다. 이 영화는 마돈나에게 미국 ‘골든 라즈베리’ 수상을 안겼는데 이 행사는 ‘영화값 1달러도 아까운 영화를 뽑자’는 취지로 아카데미 수상식 전날 열린다. 수상 부문은 ‘최악의 여우주연상’ 마돈나는 골든 라즈베리가 사랑하는 대표적 배우로 지금까지 무려 5회나 동명의 상을 거머쥐었다. 5개 영화 대부분 마돈나의 섹시한 이미지를 띄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영화에 영성과 침묵이 종소리처럼 울리는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이라니, 비웃음을 탑재한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표정들이 보이는 듯하다. 영화의 악명을 모른 체 넷플릭스를 뒤지다 우연히 보게 된 나의 한 줄 평은 ‘신파로 버무린 마지막만 뺀다면 재미, 의미면에서 추천하고 싶다’다. 1974년 만들어진 ‘귀부인과 승무원’을 리메이크한 ‘스웹트 어웨이’는 ‘사랑에 완전히 휩쓸려간’ 정도의 뜻인데 주인공은 미국 재벌가 사모님과 이태리 어부 총각. 친구 부부들과 경비행기를 타고 지중해 크루주 여행을 하게 된 안하무인 불치의 왕비병 사모님 엠버는 배 안에서 머슴 부리듯 하며 갖고 논 선원 페페와 동굴탐사를 떠났다 조난 당해 무인도에 상륙하게 된다. 둘만 있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반전은 이 영화를 코미디에서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철학 작품으로 끌어올린다.(다시 말하지만 끝부분만 빼면!)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은 극적인 장면마다 흘러 영화의 긴장과 몰입을 더해준다. 아르보 패르트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바이올린 연주회에서 나를 감전시킨 프라트레스(Fratres)도 들어보시길.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