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5월 투쟁은 6월 항쟁을 넘어선 5월 민주화 투쟁으로 불러야 한다”라는 주장이 나왔다. 송병헌 전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대표전문위원은 28일 오후 2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91년 5월 민주화운동 30주년 의미와 과제’ 세미나 세션 1에서 ‘91년 5월 투쟁의 민주변혁적 성격과 한국 민주화운동사적 의미’에 대해 주제발표를 하며 이 같은 의견을 냈다. 송병현 전문위원은 발표에서 “91년 5월 투쟁의 ‘비극적 인식’은 호칭, 트라우마, 패배라고 보는 패배담론 등에 따른 것”이라며 “민주, 민중이라는 수식어가 없어 의미가 덜 부각됐다. 또 죽음, 분신을 도구화했다는 담론, 유서대필 사건·외대 사건 등에 따른 도덕성 훼손 담론 등이 문제가 됐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독재자를 퇴진시켰다는 1960년 4월 민주혁명이나 직선제 개헌을 성취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과 달리 가시적 성과가 없다는 평을 받으며 잊고 싶은 역사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라며 “그러나 이러한 요인은 5월 투쟁 자체의 실패라기보다는 한국 민주화운동 자체의 제약이다. 5월 투쟁은 6월 항쟁을 넘어선 더 많은 민주화 투쟁으로 불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후 펼쳐진 관련 토론은 김형
91년 5월 투쟁은 당시 명지대 학생이었던 강경대 열사가 총학생회장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숨지면서 일어난 노태우 정권에 대한 대규모 저항을 일컫는다. 강경태 사망 사건을 통해 노태우 정권의 대한 분노는 1991년 4월 29일 박승희 전남대 학생 분신으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항쟁의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겹쳐지면서 국가권력의 야만적 폭력성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이끌어 냈다. 5월 투쟁은 광범위한 민중이 참여한 대중투쟁으로 평가 받는다. 학생·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이 전국에서 부문운동 조직을 매개로 단결했다. 이로써 '민중주체의 형성 가능성'을 보였다. 참여자들은 민족자주, 민중권력, 노동자권력, 민중해방 등 구회를 외치며 대안권력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 학생인권과 노동기본권 보장으로 인권담론의 지평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 1991년 4월 ▲ 4.26 = 강경대 명지대 학생 총학생회장 석방 요구 시위 중 경찰 진압에 의해 사망 ▲ 4.27 = '강경태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결성 ▲ 4.29 = 박승희 전남대 학생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 ◇ 5월 ▲ 5.1 = 김
“내가 가진 것 모두 내어 줄 테니, 노태우 아들 데려오라고 했어요. 두말 않고 돌아가더군요.” 14일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린 91년 5월 투쟁 30주년 기념전에서 만난 강경대 열사의 아버지 강민조 씨(80)는 강경한 어조로 당시를 떠올렸다. 아들 강경대가 사망한 후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백방으로 뛰던 강민조 씨를 노태우 정권은 다각도로 압박했다. 어느 날은 집으로 찾아와 20억 원을 주겠다며 회유해 좋은 말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랬더니 금액이 적어서인 줄 알았는지, 50억 원을 통장에 넣어주겠다고 또 찾아와 “돈으로 아들을 팔라는 말이냐. 노태우 아들을 데려오면 원하는 것 다 해주겠다”라고 쫓아냈다. 강 씨의 울분은 경대가 못 이룬 꿈,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이어졌다. 강민조 씨는 현재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장을 맡아 팔순이 된 지금도 다양한 민주화운동 관련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아들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꿋꿋하게 산다지만, 여전히 3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무너진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경대가 시위를 하다 다쳐서 영안실에 있다고. 다쳤는데 왜 영안실에 있지
민주화를 외치며 독재 정권에 대항해 투쟁의 깃발을 들었던 이들이 잠든 거룩한 곳, 민주화의 성지이자 이들을 기억하는 상징적 공간이 이천에 있다. 모가면 어농리에 위치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소장 김동민)은 2016년 개원해 민주주의 역사의 현장이 됐다. 민주화운동기념공원(민주공원)엔 현재 60기의 열사가 영면했다. 민주공원은 앞으로도 전국 곳곳에 잠들어 있는 민주주의 열사들을 이 곳으로 모실 계획이다. 이장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총 136명의 열사들이 이곳 민주공원에 영면하게 된다. ‘1991년 3월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민중노래패 ‘땅의 사람들’ 가입, 민주화 시위에 참여, 1991년 3월 총학생회 진군식 시위 중 학내진입 전투경찰의 직격 최루탄으로 안면 부상, 1991년 4월 26일 ‘노태우 군사 정권 타도, 학원자율화 완전 승리’ 등을 주장하며 시위 중 이를 진압하는 백골단의 쇠파이프 폭행으로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심장막 내출혈로 사망. 1972년 2월 4일 서울 출생 1991년 4월 26일 사망.’ 묘역 가운데 강경대의 묘 비석엔 그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아무런 죄 없이 조국과 민족을 먼저 생각하며, 더 행복한 세상을 꿈꿨던 대학 새내기의 일생을
봄비가 적시고 간 5월의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코로나19로 방문객은 비록 줄었지만, 이곳에 잠든 60기의 민주화 운동 관련 희생자 영령은 늘 그 자리에서 조용히 가족과 친구들을 기다린다. 묘역 한 편에서 강경대의 비석을 바라보는 김동민 민주화운동기념공원사업소장의 눈빛이 슬프다. 김동민 소장은 당시 대학 새내기던 강경대에 대해 “백골단에 맞아 죽었다”라고 했다. 김귀정에는 “대한극장 인근 시위 중 경찰에 짓밟혀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입에 담기 힘든 표현이나 사실이었다. 91년 5월 투쟁으로 꽃처럼 스러진 영혼이 13인이다. 이중 10명은 분신했다. 학생, 노동자 등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촉발은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을 외치다 경찰폭력에 의해 사망한 일이었다.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지며 일이 벌어졌다. 담담히 이를 설명하는 김동민 소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민주화 운동은 한 판 승부가 아니에요. 성과가 없다고, 패배했다고, 결국 제압됐다고 평가절하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동민 소장은 ‘5월 투쟁’의 역사적 위상을 하루빨리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5월은
기성용(32, FC서울)이 초등학생 시절 축구부 후배를 성폭행 했다는 의혹에 대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람 부인하자, 이튿날 제보자 측이 "증거는 충분하고 명확하다"고 재반박했다. 제보자들의 법률대리인 박지훈 변호사(법무법인 현)는 26일 “(기성용 성폭력 의혹과 관련해) 충분하고 명백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그러면서 “이 증거들은 기성용 선수의 최소한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해 선수 본인 또는 소속 클럽 이외에는 제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겠지만, 기성용 선수 측의 비도덕 행태가 계속된다면 부득이 공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앞서 박 변호사는 24일 보도자료를 통해 “축구선수 출신 C와 D가 초등학생 시절이던 2000년 한 해 선배인 A와 B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박 변호사는 A에 대해 ‘최근 수도권 모 명문구단에 입단한 국가대표 출신 스타 플레이어’로, B에 대해 ‘광주지역 모 대학 외래교수’로 각각 설명했다. 박 변호사 측이 증거를 공개하겠다고 한 것은 전날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기성용이 해당 의혹에 대해 전면 부인한 탓이다. 기성용은 전날에는 직접 소셜미디어(SNS)에 “긴 말이 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