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된 김용준 총리 후보자가 29일 자신에 대해 쏟아지는 각종 의혹을 견디다 못해 전격 사퇴하면서 내달 25일 출범을 앞둔 박근혜 정부는 심대한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후임 총리 인선과 조각 등의 일정이 차례로 순연되면서 최악의 경우, 내달 25일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 구성이 파행을 겪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무엇보다 ‘법·원칙·신뢰’로 대표되는 박 당선인의 정치적 자산에 대한 국민적 믿음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은 향후 박 당선인이 국정을 운영하는데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 5일만에 초단기 낙마= 김용준 국무총리 지명자가 29일 헌정 이래 역대 정권에서 지명한 초대 총리 중 낙마한 두 번째 사례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초대 총리가 낙마한 첫 사례는 제헌국회의 초대 총리로 내정된 이윤영 씨였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8년 7월22일 이씨를 국무총리 서리에 지명했지만 9일 후인 31일 실시된 국회의 임명동의안 투표에서 30.6%의 찬성에 그쳐 부결됐다.
김 지명자는 총리로 지명된 후 인사청문회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후보직에서 물러난 첫 지명자, 그것도 지명후 불과 5일 만에 물러난 최단기 지명자로 기록됐다.
제헌국회 이래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후보자는 모두 6명이다. 제헌국회의 이윤영씨 외에 이승만 전 대통령 시절의 백낙준(1950년), 이갑성(1952년), 윤보선 전 대통령 때 김도연(1960년) 씨가 국회 동의 절차에서 탈락했다.
2000년 국회 인사청문회가 도입된지 2년 뒤 두 명의 총리 서리가 연달아 낙마했다. 2002년 7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첫 여성총리 후보로 장상 당시 이화여대 총장을 총리 서리로 임명했지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장남의 이중국적 문제 등이 불거졌고, 국회에서 인준안이 부결됐다.
한달 뒤인 8월 김 전 대통령은 장대환 당시 매일경제신문 사장을 총리 서리로 임명했지만 장 서리도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의혹에 휘말려 국회 임명동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통령의 총리 지명 이후 국회 임명동의 표결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중도하차한 후보자는 김 지명자를 포함해 모두 3명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7년 이한기 씨를 총리서리로 지명했지만 6·29선언 이후 지병을 이유로 사퇴하는 바람에 국회 인준대상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김태호 전 경남지사를 총리로 지명했지만 ‘박연차 게이트’ 연루 의혹 등 야당의 거센 공격을 받으며 인사청문회 4일 후 사퇴를 선언했다.
■ 박근혜식 인사스타일 시험대= 김용준 국무총리 지명자가 29일 부동산 투기와 아들 병역면제 의혹에 휘말린 끝에 전격 사퇴함에 따라 ‘박근혜식 인사스타일’이 시험대에 올랐다.
워낙 보안을 중시하다보니 공식적인 검증시스템보다는 최측근 비선조직에 의존하는 인선방식이 부실검증으로 이어지면서 결과적으로 ‘초대 총리지명자 자진사퇴’라는 대형 참사를 일으켰다는 지적이다.
이달초 단행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 인선까지만 하더라도 박근혜 당선인 측은 청와대의 협조를 받아 인수위원 후보자들의 병역, 납세, 전과 등 기본적인 인사정보를 살펴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총리후보자 인선에서는 청와대 등 현 정부기관의 검증 협조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총리실은 김 지명자 두 아들의 부동산 투기·병역 의혹이 불거진 이후인 지난 27일에야 인사청문회준비단 명의의 입장자료를 통해 “현재 증빙서류를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총리후보자 인선은 철저하게 박 당선인의 주도로, 극도의 보안 속에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15년간 곁에서 당선인을 보좌해온 이재만 보좌관을 중심으로 통의동 당선인 비서실에서 인선 작업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덕분에 지명자 발표 순간까지 ‘철통보안’은 지켜졌지만 여론의 사나흘 사후검증 속에서 총리지명자가 무력하게 중도하자하는 결과를 낳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