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전쟁영웅

2014.07.09 21:48:13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인재양성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최중호(1891.1.20~1934.3.28)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참전 당시 ‘이곳이 뚫리면 조국이 뚫린다!’라고 외치며 전사한 김용배(1921.4.17∼1951.7.2) 육군 준장을 선정, 발표했다.



 

 

 

최중호 선생은 1891년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김구 선생이 교장으로 재직한 양산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1911년 선생은 일제가 항일운동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소위 테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에서 활동했으며, 항일군사 인재 양성을 위해 임시정부가 설립한 육군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또 박은식 선생이 주도한 사민보(四民報) 발간에도 참여했다.

1924년 상해대한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돼 교민들의 생활보호를 위해 노력하던 선생은 인성학교 학감으로 취임하면서 한인 자녀의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결성에 참여해 임시정부와 어려움에 처한 한인 동포들을 지원했다.

한편,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추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 요인 등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를 떠났다.

최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당한 고문과 옥고생활 중 얻은 폐병이 악화되어 상해를 떠나지 못하고 1934년 3월28일 영면했다.

이에 정부는 1977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선생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뜻을 기려 오는 7월23일 백범기념관에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7월 한달 간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기획전시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7월의 6·25전쟁영웅 김용배 육군 준장은 1921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소위로 임관해 1950년 충북 음성의 동락리 전투에서 적 연대를 통쾌하게 격파하는 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1년 10월6일에는 38선을 돌파 후 초산에 돌입해 10월25일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로써 김용배 장군의 부대는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에 가장 먼저 도달한 최선봉부대의 명예를 안았다.

특히 6·25전쟁 개전 이래 국군의 최초 승리로 일컬어지는 동락리전투는 1950년 7월5일부터 10일까지 충청북도 음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한강방어선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국군 부대들이 평택과 안성으로 집결하고 있을 때 원주에서 충주로 남하한 제6사단 7연대가 남진중인 북한군 제15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장호원 방면으로 진출하던 중 음성 북방의 동락리에서 적의 선두부대인 제48연대를 기습·격퇴하고 남침을 지연시킨 공세적 방어 전투였다.

7월4일 충주, 장호원 방면으로 남진 중인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고 장호원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받은 제7연대는 이날 밤 제2대대를 선발대로 출발시켰다.

정찰 중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대원들의 사격이 집중됐고 기습을 당한 적은 퇴각을 시도했으나 제3중대가 발사한 60㎜ 박격포탄으로 인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됐고, 7월6일 날이 밝아오자 교착된 기름고개의 동과 서에서 총격이 한층 가열됐다.

당시 ‘무극리로 진출해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기름고개 동쪽의 385고지 일대에 포진해 적과 대치해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이 포함된 제6사단 7연대가 전개한 동락리 전투는 개전 이래 패배감에 젖어있던 국군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가장 통쾌한 전투였으며, 북한군의 음성 진출을 1주일이나 지연시킴으로써 국군이 진천∼음성∼충주로 이어지는 저지선을 형성,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져다준 의미 있는 전투였다.

동락리 전투에서 제7연대는 적 제48연대를 기습 공격해 군수참모를 비롯한 적 132명을 포획하고 각종 포 54문과 차량 75대 등 수많은 장비를 노획했을 뿐 아니라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도 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7연대의 전승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과는 표창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전사의 귀감으로 기억돼야 한다’고 전승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1951년 7월12일 제7사단 5연대장으로 양구 토평리지구에서 중공군 제5군대 예하의 1개 연대와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면서 작전을 지시하던 중 가까운 거리에서 작렬한 적의 포탄에 의해 전사했다.

자료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 기자 lsh@kgnews.co.kr

 

이상훈 기자 lsh@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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