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영국 언론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1.3~1909.5.1)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8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참전 당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이곳을 사수한다!’라고 외치며 전사한 강희중(1926.10.11∼1950.9.3)일등상사를 선정, 발표했다.
8월의 독립운동가 베델 선생.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 선생은 조영수호조약이 체결된 1883년 이후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영국인이다.
선생은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입국했다.
당시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로 전국에서 반일 민족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선생은 양기탁과 함께 국한문판 및 순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 활동을 보도하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벌였다.
일제의 사전 검열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는 실을 수 없었던 강력한 반일 논조의 기사를 외국인 신분을 이용해 보도했다.
특히 고종황제의 친서를 영국 트리뷴지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해 을사조약의 무효를 알리는 등 일제의 강압적인 침략상을 국내외에 폭로했다.
한편 일제는 한반도 침략에 큰 걸림돌이던 베델을 추방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선생의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선생은 영국 법정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선생은 일제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싸우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에 정부는 196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선생의 뜻을 기려 2014년 8월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8월 한 달 간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기획사진을 전시할 계획이다.
8월의 6·25전쟁영웅 강희중 일등상사.
강희중 육군 일등상사는 1926년 전북 익산 출생으로 1947년 4월 조선경비대에 입대했다.
6·25전쟁 중 가장 절체절명의 낙동강 방어전투에 18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 선임하사로 안강~기계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북한의 6·25남침 이후에 3일 만에 서울이(6.28) 함락되고 대전마저(7월20일) 차례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우리군은 8월 1일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낙동강지구전투의 최대 격전지인 다부동 전투, 포항전투, 기계전투, 영천전투 등 낙동강 지구 곳곳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최후의 전투가 연일 벌어졌다.
그 중에서 기계지역은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도로 상의 요지로서 이를 상실할 경우 동부전선에서 일대 위기를 맞게 되는 요충지였다.
제18연대 1중대 1소대 선임하사 강희중 일등중사는 1950년 8월 18일 피탈된 기계일대 탈환전에서 주도 면밀한 공격행동으로 적진에 침투해 사전에 요지를 점령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 적을 격멸했다.
당시 기계 부근 일대는 아침과 저녁으로 공격과 역습을 거듭하여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그런 과정에서 시체가 무수히 산재해 그 처참한 광경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강희중 일등중사와 제1중대의 혁혁한 전공은 북한군의 부산방면 진출 기도를 저지하는데 지대한 공을 했을 뿐 아니라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적 사살 1천245명 포로 17명, 무기와 탄약 등을 다수 노획하고 대전과를 거둠으로써 당시 국방부장관은 친히 장병의 노고를 치하했으며 미군도 기계전투를 최고의 전투로 여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9월 3일 2차 안강-기계전투에서 부여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적탄에 의해 장렬히 산화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1950년 12월 30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받고 일등중사에서 일등상사로 일계급 특진했다.
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기자 l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