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수류정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수원의 독립운동가 김세환

2021.02.23 06:00:00 10면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우렁찬 함성이 쏟아졌던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도 가장 격렬했던 수원의 만세운동은 수백 명이 모인 방화수류정에서 시작됐다.

 

수원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세환은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이다. 제102주년 삼일절을 앞두고 민족주의 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1888년 11월 18일 수원 남수동 242번지에서 태어난 김세환은 당시 보시동에 세워진 감리교회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하고, 서양의 문물과 학문을 배웠다. 이곳은 현 북수동에 위치한 종로교회로 수원성내 최초의 개신교회이며, 천주교도들이 병인교난에 피 흘린 순교의 터, 북수동 368번지 종로사거리로는 1907년 이전했다.

 

서울에서 보성중학교와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후 일본에서 유학하며 신학물을 배운 뒤 귀국해 고향인 수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김세환이 처음 교편을 잡은 수원상업강습소는 지역의 조선인 상업인들 주도로 1908년 4월 15일 설립된 수원상업회의소 내 학교로, 상업에 관한 지식과 기능 강습을 통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 현 수원고등학교의 전신인 수원상업강습소는 1916년 4월 수원상업회의소 해체로 폐쇄 위기를 맞았으나 지역 유지들의 노력 덕분에 화성학원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을 이어나갔다.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는 데 이바지하려면 먼저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지닌 김세환은 수원상업강습소 사직 후 미국 여선교사 밀러의 주선으로 1913년 수원 삼일여학교 학감으로 부임했다. 삼일여학교의 기반을 다지며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그는 근대교육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늘 고민했던 청년 김세환은 3·1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19년 2월 11일 기독교 청년회 YMCA 간사였던 서울 당주동의 박희도를 통해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게 된 후 그의 가슴에는 열정이 불타올랐다.

 

수원의 3·1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의 곁에는 뜻을 함께한 동료들이 있었다. 수원 지역 만세운동의 실질적 책임자 김노적은 수원강습소 2회 졸업생으로 김세환의 제자, 보조교사로 일했던 박선태는 김세환의 후배였다.

 

 

김세환과 김노적은 삼일여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수원 시내를 거쳐 화성학원까지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일본 경찰이 먼저 눈치채면서 횃불 시위로 대체했다. 3월 1일 저녁 방화수류정에 모인 수백여 명이 만세운동을 시작했고, 16일 팔달산 서장대와 동문 안 연무대 등에서 이어진 운동은 전국에서도 가장 격렬했다.

 

만세운동 당일인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한 김세환은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수원에서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김세환 역시 검거되자 지역에 대한 탄압이 강화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수원경찰서에 붙잡혀 들어갔다.

 

3월 13일 주동자급 인물로 서울에서 체포된 김세환은 “아무리 세계 대세로 병합이 됐다고 하더라도 가슴 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모든 물건을 대할 때 초목에서 흐르는 눈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지경이었다”고 고백했다.

 

재판장이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계속 운동할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그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하며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수차례 재판을 받고 약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920년 10월 30일 경심복심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돼 수원으로 돌아왔다.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으로 찍힌 김세환은 교직에 복직하지 못하고 시내에서 곡물상을 운영하며 지역 내 여러 사회운동에 관여했다.

 

신간회 창립 이듬해인 1928년 8월 19일 개최된 임시대회에서 신간회 임시지회장으로 선출된 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더불어 수원체육회장을 역임하는 등 민족주의 운동을 지속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 독립을 맞이한 김세환은 그해 9월 16일 5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김세환의 업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68년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또한 수원시는 2008년 지역의 명예를 드높인 공적을 인정해 명예의 전당에 독립운동가 김세환의 이름을 올렸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신연경 기자 shinyk@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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