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고인 물의 숙명과 혁신에 대하여”

2021.09.27 06:00:00 16면

- 정도전의 불교비판

‘삼봉(三峰)’이라는 호를 가졌던 조선의 사상과 정치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이 고려말 불교의 타락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기 그지없다. 무위도식하는 자들을 간사한 무리라는 뜻으로 ‘간민(姦民)’이라고 불렀던 그는 특히 승려들이 그렇다면서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광대한 토지와 노비를 두고 장부를 구름같이 쌓아둔 것이 관청의 장부보다 많다. 하는 말은 번뇌를 끊고 세속을 벗어나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서 욕심을 없앤다고 하는데 찾아본 들 그런 게 있기나 한가? 평민 열집의 재산을 하루 아침에 소비해버리고 의리를 폐기한 채 인륜을 좀 먹는 해충이 되었구나.”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佛氏雜辯)>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불씨’는 석가모니를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불교의 본질을 그렇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당시 고려 불교의 말기 현상은 이런 비판을 피해가기 어려웠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통해 유학(儒學)에 기반한 정치체제를 구상한 정도전은 시대적 적폐를 혁신하려는 혁명가였다. 1496년 성종때 완성된 조선의 기본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그의 <조선경국전>에 뿌리를 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때 전진(前秦)의 순도(順道)라는 승려가 불상과 불경을 전한 이래 천년의 역사를 찬란하게 누려왔던 불교로서는 수치스러운 사태였다. 더군다나 원효라는 세계사상사의 걸출한 인물을 낳은 불교가 그 모양이 되었으니 대꾸할 말이 없는 지경이었던 셈이다.

 

 

-원효의 “큰 수레”

그 어떤 것에도 거리낌이 없다는 무애(無碍)의 정신으로 화엄(華嚴)의 뜻을 새긴 원효는 다툼과 편견이 요란한 세상에서 낮고 낮은 자리로 들어가 모두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큰 마음을 일깨웠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고 어떤 물건도 허비됨이 없도록 하며 각각 다 존엄함을 누리는 가운데 특유의 재능을 발휘하면서도 전체가 조화로운 길을 열어나간 것이다.

 

원효는 서로 다르면서도 같고 같은 중에도 다름이 어우러지는 세상을 만들어가려했다. 그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첫 문장은 “대(大)란 바로 진리의 명칭으로 널리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이요, 승(乘)은 비유로 실어나른다는 말이다”라고 적고 있다.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이 함께 타고 갈 “진리의 큰 수레”를 만들어가는 일에 대한 논증이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니라 권력을 타고 앉아 가던 불교는 모두를 위한 큰 수레가 아니라 자기들만 독차지하는 수레를 굴리다가 당대에는 주변부적 존재였던 신진 유학자들로부터 직격탄을 맞게 된다. 더군다나 이들 유학자들의 성리학(性理學)이 불교가 꽉 잡고 있었다고 여긴 마음의 문제를 비롯해서 인격 도야의 수련까지 도맡아 논쟁과 실천에 나서는 바람에 정신사의 주도권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원효, 의상, 지눌로 이어지는 불교사상의 자리는 그렇게 해서 조선의 성리학에게 넘어갔다. 정도전이 <심기리편(心氣理編)>이라는 저술로 유학의 철학적 깊이를 파고 들어간 결과다.

 

불교는 마음(心)을 다루고 도교는 기(氣)를 다룬다고 하지만 정작 그 본체인 리(理)를 제대로 알지 못해 인식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비판이었다. 불교가 들어온 바로 그해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태학(太學)을 세운 것을 떠올려보면 그 정신사의 주도권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성리학의 처음 그리고 고인물

“성리학”이라는 것도 따져보면 중국 송대의 신(新)유학으로 인간의 본성(本性)과 성정(性情)의 복잡한 내면구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이런 면모를 처음 체계적으로 인식했던 정몽주를 조선 유학의 시조라는 의미로 “동방리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부른 것은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를 단지 선죽교에서 암살당한 고려의 충절(忠節) 신하로만 기억하는 것은 우리 정신사의 중요한 대목 하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꼴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기세좋게 나갔던 유학도 창업의 시대를 지나면서 권력의 맛을 누리다가 고인 물이 되어가더니 처참한 사화와 분파적 정쟁에 휩싸이면서 그 기력이 소진되어가기 시작한다. 선조 때 이조(吏曹) 전랑(銓郞) 인사 문제로 붕당(朋黨)의 대립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당쟁의 분파가 극성을 부리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전랑은 그 지위가 별것이 아니나 공론(公論)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어 여론의 향방과 평판의 가늠자를 쥐고 있는 처지였으니 서로 그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려는 치열한 경쟁이 있기 마련이었다. 전랑은 후임 전랑을 천거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김효원이 추천되었다가 심의겸이 결사반대를 하는 바람에 낙마하게 된다. 심의겸은 외척 세도가인 윤원형과 김효원의 관계를 의심하고 그를 세도에 아부하는 자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김효원은 서울 동쪽 진천동에 살고 있었고 심의겸은 서울 서쪽 정릉방에 살고 있었기에 이로 하여 동인과 서인으로 불리면서 붕당의 출현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파벌의 분화는 동인과 서인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가면서 조선정치는 난마(亂麻)와도 같은 늪에 빠져든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 리(理)가 주(主)요, 기(氣)가 주요하면서 현실적 의미도 없는 유럽 중세의 스콜라적 논쟁과 같은 허설(虛說)로 날을 지새웠다. 여기에 덧붙여 군주의 상(喪)을 어찌 지내야 예(禮)에 맞는지를 가지고 죽을힘을 다해 서로 싸워댔다는 것은 훗날 일제가 조선사를 당쟁과 사화로 점철된 망국의 역사라고 조롱하는 근거가 되었다.

 

사실 조선 성리학의 두 태두(泰斗)인 이퇴계와 이율곡이 정밀하게 전개했던 리(理)와 기(氣)에 대한 논쟁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제대로 된 인격을 만들어내고 하늘이 본래 내려준 본성을 가지고 군자(君子)를 넘어 성인(聖人)의 지경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고민한 철학체계다. 인간이 자신을 끊임없이 수양하면서 세상을 바르게 만들어가는 기본 저력에 대한 논의였다.

 

 

이른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한 논쟁은 지금 보면 무슨 소리인지 알기 무척 어렵고 저런 논쟁이 도대체 뭐에 필요한가 싶을 정도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제대로 된 품성을 기르고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서구 근대사상의 틀에 이바지한 데이비트 흄이나 아담 스미스의 도덕에 대한 저작 그 첫 장이 모두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에 대한 논의라는 점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이런 논의에 앞서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붕당(朋黨)의 정치적 자살행위

논의의 출발은 좋았으나 그걸 가지고 어떻게 세상에 제대로 기여할 것인가의 문제 앞에서는 파당에 빠지고 민중의 현실은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에 대한 다산 정약용의 분노는 대단했다.

 

“오늘날 성리학을 하는 자들은 리(理)니 기(氣)니, 성(性)이니 정(情)이니 체(體)니 용(用)이니 하고 리가 발(發)한다, 기가 발한다 그러면서 서로 성내고 떠든다. 텅 빈 마음에 거만해져서 저만 옳다고 한다.”

 

다산은 사대부들이 이런 논쟁에 온통 에너지를 쏟아 넣고는 현실과 상관없는 말들만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을 했다. 게다가 이런 논쟁들이 당쟁과 사화로 이어져 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다산보다 먼저 태어나 한글을 연구한 실학자 정동유(鄭東愈)는 이렇게 탄식한다.

 

“옛사람은 말했다. 재물로써 자손을 죽이는 일이 없게 하고, 학술로써 천하와 후세를 죽이는 일이 없게 하라고. 아아, 그런데 어찌하여 성리학의 논쟁이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되고 도끼가 되고 있는가?”

 

1890년대에 나온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이런 조선 정치사의 현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문명사>를 쓴 국학자 안확은 붕당의 어두운 면만 보지 말고 이런 정치의 활발한 논쟁이 왕권의 전제정치에 일정하게 제동을 걸었고 지방 자치제의 역동성을 만들어낸 것도 아울러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율곡이 붕당이 문제가 아니라 그 붕당이 제대로 된 정치를 지향하는가가 더 중요한 본질이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논리다.

 

 

해방직후 <조선유학사>를 저술한 현상윤이 유학이 조선의 정치에 청렴과 의리, 도덕과 품격을 제공해준 점은 공(功)이라며 탐관오리가 도처에 발호하기 시작한 것은 사대부 정치의 기반이 허물어진 조선조 말이라고 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역사적 관찰이다.

 

이 대목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좋은 시작이 끝까지 이어지려면 본래의 정신이 태어난 현실을 되새기고 지금 여기의 현실과 마주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확이나 현상윤이 그나마 잡고 있는 역사의 한 자락도 무너질 판이다.

 

새로운 시대를 꿈꾼 선두자들이 세월이 흘러 고인 물이 되어 혁신에 대한 일체의 의지를 잃으면 도리어 시대의 진전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새 교조가 되어 자기들의 권력을 옹호하는 논리에 불과해지고 그 어디에도 참신한 생각과 주장은 발견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다가 송시열이 주자의 학설과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공박하며 사상의 불모지를 만들어버린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성호 이익은 “한 글자만 의문을 달아도 망령되다고 하고 그리 하다가 생각이 옹졸해지고 뜻과 기개가 사라져 텅 빈 땅처럼 되고 만다”라고 탄식했다. 그러니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혀서 돌파력을 가진 사상과 이론이 나오기는 쉽지 않게 된다. 우리 언론의 현실은 바로 그런 암담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야만이다.

 

-계속되어야 할 질문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가? 모두가 함께 타고 갈 “진리의 큰 수레”를 만드는 일에 열정을 발휘하고 있는 사회일까? 마음과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도덕적 노력을 귀하게 여기는 시대인가?

 

광대한 토지를 쥐고 매일 재산을 더 불리기 위한 간사한 무리들이 여기저기 들끓고 있지는 않은가? 문명의 역사는 거대하고 세계는 날로 새로운 생각을 호흡하고 나누고 있는데 우리는 남과 북 사이의 소통도 막힌 채 옹졸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북은 여전히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문난적”이고 우리는 우리가 잘 살고 있다면서 거만하게 구는 것은 아닐까?

 

아침에 눈뜨면 괴물들의 뉴스가 뒤덮고 있다. 평민 열 집의 재산을 하루아침에 먹어치우는 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시민들이 개혁하라고 권력을 쥐어 준 자들은 저 자들을 닮아가고 있거나 침묵하고 있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입을 다문 지 오래 되었다.

 

질문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사상적으로 참혹한 시대를 뚫고 실학이 등장했으니 우리 조선 사상사의 위업이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에게는 그런 저력이 분명히 있다.

 

 

 

 

 

김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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