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51 - 상전벽해의 남포리 화동(化洞) 이야기

2021.11.04 08:47:14 15면

 화동(化洞) 마을은 백령도 남동쪽에 위치하며, 2021년 1월 기준으로 94가구 117명이 거주하고 있으나 1970년대 한때 100여 가구 560여 명에 달했던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마을 동쪽은 군수골과 오군포(五軍浦) 해안, 서쪽은 서사골을 경계로 가을2리(소가을리)와 접한다. 남쪽은 해마당재를 중심으로 장촌 부락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과거 갯골 건너 북포2리인 신화동 지역을 마주하고 있다. 장촌이나 소가을리 방면을 제외하면 대부분 바다와 접한 살기 좋았던 아늑한 포구 중심의 마을이었다.

 

지형을 중심으로 보면 남포리 산 1번지인 가진물뿌리(화동마을농장이 있던 지역)가 길게 북서쪽으로 돌출돼 있고, 그 서쪽에 선창뿌리와 마주보고 있다. 이 끝에 과거에는 초가집이 2채 있었으며, 현재는 그 집터에 호수펜션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 거주했던 최상윤씨가 뱃사공이었으며 개머리(신화동)와 차넘이(車踰, 신화동), 당뒤(당후동, 북포리), 대가을, 사곶 등을 왕래했다.

 

1950년대 전쟁 후 먹거리 해결을 위해 장촌, 화동, 중화동 주민들에겐 해산물, 농산물을 비롯해 솔가리 등 땔감 3~4묶음을 지게에 지고 나룻배를 통해 진촌까지 왕래했다고 하니 무성영화 속 장면처럼 이제 구전 속 옛날 이야기가 됐다.

 

1957년 처음 제1정착지 제방을 막기 시작해 안쪽으로는 천일염전을, 더 안쪽으로는 논을 조성해 옛날 해안가에 있던 마을이 약 1㎞나 더 들어온 것이다. 올해부터는 마지막 염전(장두신씨 운영, 화동 거주)이었던 화동염전도 폐전돼 일부는 논으로 경작하고 있어 백령도에서의 염전은 보기 힘들어졌다.

 

조선시대 이래 황해도 백령 소금은 유명했는데 훼손된 염전 잔해와 소금 창고 등 그 흔적을 보니 아쉬운 맘이 가득하다.

 

따라서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농지에 간척지가 추가된 형국이며, 반대로 갯벌이 사라졌다. 간척 이전에는 곳곳에 어장이 형성됐으며, 간조시에 펼쳐지는 넓은 뻘은 대체로 칠게나 조개류의 서식 어장으로서 주민들의 농사 이외 주요 소득원이었다.

 

▶ 지명 유래

 

‘화동’이라는 명칭 이전에 역사책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그리고 무슨 이유로 현재의 지명으로 불리웠을까? 현재의 지명 전에는 ‘역대촌(驛垈村)’ 또는 ‘역촌(驛村)’으로 부르던 마을로, 고려시대 역사(驛舍)가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백령도지’(1620)에 “본도는 별읍(別邑)이 되어 지금도 역리동(驛里洞) 등의 이름이 전해진다”라는 기록이 있고 ‘백령진지’(1802)에는 역대동(驛垈洞)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과거에는 역이 있었다는 방증일 것이며, 잿등 고갯길을 ‘역퇴밑재’라 부르고 있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후 화동으로 지명이 변경된 이유는 알 수 없으며 조선 말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의해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질 뿐 자세한 내막은 지역 주민의 정보를 기다릴 뿐이다.

▶ 화동의 종교와 교육

 

화동 마을에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화동교회와 화동공소가 있다. 화동교회는 1917년 3월 중화동교회에서 분립해 초가 6칸 건물에서 설립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됐다. 분립의 계기는 1903년부터 최씨 일가(최대수, 최익현, 최익삼)의 헌신적 종교활동의 결과이며, 백령도에서 4번째의 긴 역사를 지닌다.

 

1931년에는 15평 규모의 함석지붕 목조 예배당을 지어 봉헌했으며, 일제 말기에는 집회 금지로 인해 문을 닫았다. 해방 후에는 다시 문을 열었으나 예배를 인도할 목회자가 없어 1947년부터는 중화동교회의 김형찬 집사가 화동으로 이사를 와서 예배를 이어갔으며, 당시 중화동교회의 허간 목사는 김형찬 집사를 영수로 취임시키고 교회를 지키도록 했다.

 

1960~70년대에 가장 많은 신자가 모여 지금까지 화동교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17대 박윤환 목사가 시무를 이어가고 있다. 2017년에는 100주년 기념예배당 헌당식을 거행해 화동 주민들의 정신적 안식처와 일체감 형성에 구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화동공소는 1960년대 건립됐으며 공소회장으로는 김태규, 장원칠, 김치숙, 박원임, 변정원 등이 있으며 한 때는 16세대 37명의 교우가 믿음을 나누기도 했다. 현재 대부분 천주교인은 60~80대 고령층이며 농업에 종사한다.

 

과거 화동지역은 ‘뿌리가 있다’라고 할 정도로 배움의 열기가 뜨거운 마을이었다. 최익봉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서당을 열어 지역주민의 문맹 타파에 힘썼으며, 일제의 서당 탄압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백령실업학교는 향학열의 대표적 본보기인데, 1965년경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준형 선생님과 마을 청년들이 인근 지역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는 30여 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야학으로 시작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1968년 12월 준공됐다.

 

총 8년 동안 15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이후 지역주민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져 학생 수가 줄어든 관계로 1973년 폐교됐다.

 

▶ 화동의 인물 : 최응상(崔應祥, 1924~2021)

 

남포리 화동 출신으로 대청공립보통학교에 이어 진남포공립보통학교(전학), 평양공업학교를 거쳐 중국 심양의 봉천공업대학 재학 중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 서울대 공과대학 전문부 채광과(採鑛科, 현 에너지자원공학과)에서 수학 후 1947년 졸업했다(1회).

 

초등학생으로 대청공립보통학교(1932년 개교, 현 대청초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유학파 출신 엘리트로 대학 졸업 이후에는 고향인 백령도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백령중고교의 설립 인가 이전인 진촌리공회당터(현 백령리조텔 부근)에 자리한 백령고등공민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시작, 북포리 신화동에 설립 인가 이후에도 줄곧 수학교사로 1969년까지 재직했다.

 

지금도 제자들 사이에선 학식과 덕망의 명성이 자자하며, 훤칠한 인물에 큰 체격만큼 보폭도 넓고 빠른 발걸음에 ‘B-29’란 별칭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70년대에는 지식인으로서 지역사회의 부름을 받아 교직 생활을 중단하고, 백령면장(1973~1980)으로 도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공무원으로서 청렴결백하고, 사리분별이 정확한 신사였다는 후일담이다.

 

또 면장 재직 당시 내무부 관리가 통일벼를 권장하자 백령도에는 지역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해 거부했다는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는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두 달여 전 향년 98세로 타계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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