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⑳ 항일 투쟁의 산실, 대한민국임시정부

2021.11.23 06:00:00 16면

대한민국임시정부, 3·1운동으로 발현된 독립 열망 이어가
1932년 한인애국단 활약으로 수난 극복
광복군 창설 통해 일제에 선전포고
남북한 단일 정부 수립 희망했으나 좌절

 

“독립선언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식 거행을 통고하고, 독립선언서 낭독 후 체포를 당한다.

 

그리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과 시민들,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가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태극기를 펄럭였다. 일제 탄압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그렇게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 3·1운동, 이는 임시정부 수립으로 연결됐다.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하이,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 29명은 조국의 광복을 바라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고 다음 날인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장 등을 의결 및 선포하며 항일 투쟁의 산실인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역사가 시작됐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 국무원 비서장에 조소앙,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에 최재형, 군무총장에 이동휘, 법무총장에 이시영, 그리고 문창범에게 교통총장을 맡겼다.

 

그해 9월 연해주를 중심으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정부 형태로 개편한 대한국민의회 등을 흡수하고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를 수립한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통합과정을 거쳐 진정한 정부로 거듭났다.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했으며 독립신문을 발행, 각종 외교 선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애국공채 발행 및 국민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또한 임시정부는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해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상황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강화체제에 의한 국제적 안정 기조를 고집하던 열강들의 냉대와 일제의 추격에 의해 국내 조직이 파괴, 해외 각처에 산재한 동포사회의 교통·통신의 장벽 등으로 애초 계획했던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운영 기술이 미숙해 국민적 지지기반의 붕괴를 겪은 임시정부는 이러한 어려움을 타파하고자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수집했고 두 차례 헌법개정을 단행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국민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며 수난을 겪었다.

 

이에 김구는 1931년 보다 직접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특무 조직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듬해인 1932년 1월부터 한인애국단의 단원들은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을 시작으로 그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까지 이어지며 국민적 지지를 받음과 동시에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됐다.

 

특히 윤봉길의 의거의 경우 국제적으로 한인의 반일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역할뿐만 아니라 상하이 사변 등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용사가 능히 하였으니 장하도다”라 말하며 윤봉길을 칭송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으로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어 1937년 일어난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중국 전역을 옮겨 다녀야 했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항저우를 비롯해 전장, 난징, 자싱,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 태평양전쟁 발발에 맞춰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연합군과 함께 참전했다.

 

또 중국정부를 통해 국제외교를 강화해 카이로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는 등 성과를 거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그토록 바라던 광복이 찾아오기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과 자유를 위해 27년간 외교활동을 비롯한 의열투쟁, 군사 활동 및 교육·문화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1945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에게 고(告) 함’이란 성명서를 통해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단계이다”며 “본 임시정부는 최속 기간 내에 곧 입국할 것, 전국적 보선에 의한 정식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저명한 각 민주 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이다”고 정권 수립의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돌아온 대한민국의 상황은 그들이 바라고 희망을 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한반도 38도선 이남에서 군정을 펼치던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단 입장을 고수했고, 이로 인해 요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대한민국의 땅을 밟은 임시정부의 요원들은 서대문 근처 경교장에 자리를 잡고 과도정권 수립에 들어갔다. 김구가 국내 정치지도자를 만나는 한편, 내무부장 신익희는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운영했다.

 

 

1946년 2월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가 발족됐으나, 이 조직이 미군정 자문기관 민주의원으로 변질되면서 과도정권 수립이 좌절됐다.

 

또한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과 영국, 소련의 외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며 건국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는 ‘4국 원수(元首)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 즉시 독립을 주장하며 반탁 운동을 실시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방해와 남한만의 정부를 우선 수립하자’라고 주장하는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한국민족대표자회의 결성 등으로 결국 남북한 단일 정부 수립을 바라던 임시정부의 꿈은 무너졌다.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임시정부는 해산됐고, 그 법통은 대한민국 정부가 계승해나갔다.

 

 

비록 그들이 구상한 남북한 단일정부 수립은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수십 년간 나라 잃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조국 독립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그들이 있어 현재 우리가,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특별한 날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되새겨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 경기신문 = 김도균 기자 ]

김도균 기자 dok5@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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