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53 - 소금(자염) 생산의 최적지, 백령도 가을리 이야기

2021.11.18 09:13:42 15면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가을리(加乙里)는 위치상 섬 북서쪽에 해당한다. 동쪽은 북포1리(堂後洞 일명 당뒷마을)와 접하며 남쪽은 화동, 서쪽은 연지동(연화1리)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

 

가을리는 법정동이며 가을1리(대가을리)·2리(소가을리)·3리(잔대동)의 3개 행정동으로 나뉜다. 2021년 1월 기준 현재 가을1리 78가구 145명, 가을2리 57가구 111명, 가을3리는 44가구 80명이 거주한다. 총 179가구 336명이다.

 

가을리 일대의 지형을 보면 과거 대가을리와 소가을리는 갯벌(바다)이었기 때문에 돌다리를 놓고 왕래했으며, 대가을리 앞으로는 낮으막한 당산(堂山)을 마주하고 있다. 남서쪽은 갯벌을 간척해 현재는 농경지(논)로 사용하고 있다. 북으로는 업죽산(松封山) 줄기가 동서로 길게 병풍처럼 이어지면서 북풍을 막는 울타리가 되고 있다.

 

간척사업 이전의 가을1리 지역은 물론 ‘당뒷(당후) 마을’ 앞이나 가을3리의 ‘잔대동’ 장골까지 조수(潮水)가 드나들던 바다였다. 즉 현재 대·소가을리와 잔대동 사이 논으로 경작되는 대부분 지역은 간척지이며, 과거에는 갯벌(바다)이었다. 이 갯벌 지역에서는 무엇이 유명했을까? 지명유래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 소금생산과 관련된 지명 유래, 가을리

 

소가을리 마을 입구에는 2017년 가을2리 마을 경관사업과 그 내역을 알리는 비석과 함께 목제 입간판이 세워져 가을리의 유래를 안내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백령진지’(1802년)에 의하면 백령도를 진내면(鎭內面)과 촌면(村面) 등 2개 면으로 나누며 그 중 촌면은 소갈염(小乫鹽), 대갈염(大乫鹽) 2개 마을로 표기하는데, 이것이 바로 가을리의 옛 지명이다.

 

‘땅이름 갈(乫)’자와 ‘소금 염(鹽)’자를 써서 ‘갈염’이란 지명으로 전해졌는데, 조선 선조 때부터 국영 염전의 염벗(염분, 鹽盆)이 있었던 곳이다. 염벗이란 바닷물을 철솥에 끓여서 자염(煮鹽)을 만들었던 곳으로 자염의 생산과정은 오늘의 천일염과는 달리 과정이 상당히 복잡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 지명을 ‘갈염’ 또는 ‘가을’ 등으로 부르는 것은 ‘갯벌을 쟁기에 대고 갈다’라는 ‘갈’의 뜻이다. 질이 좋고 많은 양의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리 때 갯벌 밑바닥에 잠겨있는 짙은 염분이 위로 올라와 겨리(논밭을 갈기 위해 쟁기에 소 등 두 마리의 짐승을 짝을 지어 묶음)를 대고 갈아엎어야 하고 오랫 동안 웅덩이에 잡아두었던 염도가 높은 물을 섞어서 우려낸 후 이것을 솥에다 끓여야만 했다.

 

즉 쟁기를 대고 염도 높은 뻘바닥을 갈아 엎어 만드는 소금이라 하여 ‘갈염(乫鹽)’이라 했고 육지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육수(陸水, 민물)가 한 방울도 안 섞인 순수한 염수(鹽水)로서 양이 많이 나고 질이 특출해 나라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지명까지 ‘갈염’으로 부르다가 ‘가을염’ ‘가을동’ 등으로 변했고, 큰 마을을 ‘대갈동(大乫洞)’ 또는 ‘대가을(大加乙)’ 그리고 작은 마을을 ‘소갈동(小乫洞)’ 또는 ‘소가을(小加乙)’ 등으로 부르게 됐다.

 

주목할 점은 ‘을(乙)’의 끝소리 ‘ㄹ’만을 취해 쓰는 예가 많은데, 이것은 우리 글을 한자로 쓰면서 생긴 이두식 표현이다. 우리말의 ‘ㄹ’ 받침이 있는 말을 적을 때에는 ‘을(乙)’을 썼다.

 

● 대가을동(大加乙洞)

 

‘백령진지’에는 ‘대갈염’, ‘대가염(大加鹽)’ 등으로 기록돼 있어 염벗에서 자염을 생산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조선 광해군 때의 이항복(李恒福)은 백령도의 ‘심은포(深隱浦)’와 ‘염수포(鹽水浦)’가 황해도에서 제일가는 염장이라 하여 이 염장과 필요한 연료를 보호하기 위해 백령진 자염군(煮鹽軍) 50명을 배치하기도 했다. 심은포는 오늘날 화동(化洞)과 가을리 일대로 생각된다.

 

● 소가을동(小加乙洞)

 

대가을동 서쪽 논벌 건너에 있는 마을로 ‘소갈염’ 또는 ‘소가염동(小加鹽洞)’ 등으로 기록됐다. 조선 후기까지도 대가을동과 소가을동 사이는 조수가 들어오면 큰 바다를 이루었고 썰물 때면 갯벌이 되던 곳으로 소금을 만드는 염벗의 위치로는 아주 적지였던 곳으로 보여진다”고 소개하고 있다.

 

▶ 소금(자염, 煮鹽) 생산의 최적지, 가을리

 

간척되기 이전 ‘백령도의 지중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던 가을리 일대 갯벌은 역사적으로 황해안의 질 좋은 소금 산지였으며, 소금 생산 방법은 ‘자염(煮鹽)’이었다. 주변에 큰 강이 없어 민물이 섞이지 않아 염도가 높은 해수가 풍부했으며, 만(灣) 지형에 갯벌의 발달은 물론 땔감 등 연료 확보에도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대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갈동슈퍼’ 김선매(72)씨는 돌다리로 소가을리를 왕래하던 40~50년 전에는 가게 주변에 많은 염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즉, 가을리가 조선 시대처럼 먼 과거와 비교할 때 소금생산 방식은 변했겠지만 간척되기 전까지 수 백년 동안 소금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제염(製鹽) 활동의 최적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가을리 소금 생산 활동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백령도 가을리 제염 활동에 대한 인류학적 혹은 민족지적 민속 유산으로서 체계적인 정리와 복원 및 홍보활동이 필요한 때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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