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수의 월드뮤직기행]사랑하다 늙어버리다, 브란두아르디의 ‘당신이 늙었을 때’

2021.11.22 06:00:00 13면

월드스타를 낳은 월드뮤직 21

 

글 쓰다 막힐 때는 시집들이 꽂혀있는 책장 앞으로 간다. 그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무 시집이나 꺼내 들어 아무 곳이나 펼쳐 든다. 날카롭게 벼린 시어 하나가 툭 튀어나와 막힌 생각을 뚫어줬으면 하는, 주술에 기대는 듯한 마음으로 뒤적인다.

 

오늘 손에 잡힌 시집은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좍 펼쳐지는 부분은 닳도록 읽은 시 ‘그대가 늙었을 때(When You are Old)’가 담긴 쪽이다. 예이츠가 평생 사랑했던 운명의 여인 모드 곤(Maud Gonne)에게 바친 시인데, 내가 아는 사랑의 시 중 이 이상의 절창이 있을까 싶다.

 

이탈리아의 가수이자 작곡가인 안젤로 브란두아르디(Angelo Branduardi)도 이 시에 반해 노래로 만들었다. 기타 전주는 사랑 고백을 앞두고 떨리는 사내의 심장 소리 같고 노래는 오랫동안 삭힌 그리움, 두려움을 들킨 순정한 사내의 마음이 느껴진다. 노랫말은 예이츠 시를 거의 그대로 썼다.

 

‘그대 늙어 머리 희고 졸음이 많아져 /난로 앞에서 고개를 꾸벅일 때/ 이 책을 가져가요/ 그리고 천천히 읽으며/ 그대 눈이 한때 지녔던 부드러운 눈빛, 깊은 그림자를 꿈꿔봐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기품을 사랑했으며 /거짓이든 진실이든 그대 아름다움을 사랑했는지/ 그러나 단 한 사람, 그대 안의 순례하는 영혼을 사랑한 이가 있소/ 또한 그대 얼굴의 변화에 깃든 슬픔을 사랑한 이가......(후략)

 

가사 초반 나오는 ‘책’은 예이츠가 사랑 시들을 담아 모드 곤에서 선물한 노트라는 것. 모드 곤을 향한 예이츠의 사랑이 무려 30년 세월이었다는 것을 알면 시가 다르게 읽힐 것이다. 시인이 시에 담아 하고 싶었던 말은 ‘먼 훗날, 나 예이츠가 선물한 책 속의 시를 보면서 기억해 주시길 바라오. 숱한 사내들이 당신의 청춘과 아름다움만을 사랑했지만 나 예이츠는 당신의 영혼을, 그리고 늙음과 슬픔까지 사랑했다는 것을 말이오!’ 정도일 것이다.

 

예이츠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그가 사랑에 빠진 1890년대는 고국 아일랜드가 영국 통치 아래 신음하던 때였다. 배우였던 모드 곤은 아일랜드 자치, 독립을 위해 혁명에 투신, 예이츠와의 낭만적 사랑 대신 혁명동지 존 맥브라이드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독신으로 살던 예이츠는 그의 나이 51세인 1916년, 모드 곤 남편이 투쟁 도중 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한 해, 예이츠의 기행이 이어진다. 남편 잃은 모드 곤에게 찾아가 재차 청혼했다 거절당한 예이츠는 이후 그녀의 21세 양녀에게 청혼했다 역시 거절당한다. (롤리타를 사랑해 가까이 있고 싶어 그녀 어머니와 결혼한 험버트 교수 같은 심사였을까) 그해가 가기 전 예이츠는 소개로 만난 25세 여성과 결혼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 대한 30년 넘는 사랑. 젊음도 아름다움도 모두 보낸 여인의 영혼과 슬픔만이라도 갖고 싶었던 사랑, 끝내 버림받은 상처투성이 영육으로 해버린 결혼. 60편 넘는 사랑 시는 그 산고의 대가일 것이다.

 

글 좀 안 풀린다고 재능 없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하던 마음이 좀 가벼워진다. 머리 나쁜 게 머리 아픈 것보다 낫지 않을까.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김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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