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수의 월드뮤직기행] 잉글리쉬 페이션트 ‘Szerelem Szerlem’

2021.12.24 06:00:00 13면

영화 속의 월드뮤직 4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터키의 옛 노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노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먼 북소리’를 통해 알려졌다. 심신이 지쳐있던 하루키는 내면의 북소리에 펜을 던지고 유랑길에 올랐고 3년간의 유럽여행 후 그 책을 썼다. 북소리를 번역기로 돌리면 ‘ 힘들고 외롭고 지친 당신, 변화가 필요하다. 떠나라!’ 정도가 아닐는지. 내게는 노래가 먼 북소리다.

 

헝가리 가수 마르타 세베스첸(Marta Sebestyen)의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세베스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이슬람교의 아잔 소리가 떠올랐다. 신도들에게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울리는 아잔은 인간만사, 희노애락에 오욕을 품어주면서 초탈로 이끈다. 폐부를 긁으면서 종내 세상 끝에 선 것처럼 쓸쓸하게 만드는 그 소리.

 

아잔소리같은 마르타 세베스첸의 목소리는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통해 처음 만났다. 1996년도 나왔으니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옛날 영화’겠지만 지금 봐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 북부 한 수도원에 이름도 국적도 잃은 채 죽어가던 화상환자가 있었다. ‘영국인 환자’로 불리던 남자. 그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기막힌 사랑이야기가 광활한 사막을 무대로 펼쳐진다. 전쟁 전 사막지도를 제작하던 헝가리 탐험가 알마시는 동료 제프리의 부인 캐서린과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안 그녀의 남편은 경비행기를 이용해 보복을 가하는데 이는 사고로 이어져 남편은 즉사, 알마시와 캐서린은 크게 다친다. 알마시는 목숨이 경각에 달한 캐서린을 사막의 동굴에 두고 그녀를 살릴 비행기 연료를 얻기 위해 떠난다. 극비 사막지도를 적에게 넘겨가면서 연료를 구해 돌아온 알마시. 그러나 이미 캐서린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캐서린 없는 세상은 무의미했던 알마시에게 비행기 추락으로 입은 치명적 화상은 저주였을까, 은총이었을까. 수도원에서 그를 돌보던 간호사 한나는 알마시의 간절한 원대로 치사량의 모르핀을 주사해 그의 고통을 끝내준다.

 

간호사 한나역을 맡은 이는 무려 줄리에트 비노쉬. 영화 속 비중이 작지 않으면서 존재감이 떨어진 것은 알마시와 캐서린의 사랑 이야기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무대로 펼쳐진 사막의 드라마 또한 두 시간 넘는 상영시간이 짧게 느껴지게 만든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제6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 조연상, 각색상, 미술상, 촬영상, 의상상, 편집상, 음악상, 음향상 등 9개 부문을 석권해 감독 앤소니 밍겔라를 명장의 반열에 올렸고 원작소설인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부각했다. 작가 마이클 온다체는 이 소설로 영국의 맨부커상을 받았는데 지난 50년간 최고 작품에 주는 ‘골든 맨부커상’까지 받았다. 영화를 본 후 바로 소설을 밤을 지새며 보았던 나는 영화 역시 세 번이나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작품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르타 세베스첸의 목소리다.

 

인도와 미국의 사막여행 후 ‘사막에 미친 여자’가 되었던 내 심장을 두드리는 먼 북소리, 그 환장할 목소리. 영화의 모든 것을 담은 그 목소리를 영화의 초입에 넣은 음악감독 가브리엘 야레(Gabriel Yared)에 찬사를.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김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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