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수의 월드뮤직기행] 세상의 모든 아침

2022.01.17 06:00:00 13면

영화 속의 월드뮤직 7

 

정말로 음악 한 곡이 인생을 바꾼다.

 

열아홉 살까지 음악과 무관하게 살았다는 연주자 K. 대입이 코앞이던 어느 날, 방과 후 버스 정류장의 음반가게에서 들린 악기 소리에 ‘온몸이 빨려 드는 듯한’ 경험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기도 배우기도 힘든 악기라는 것을 안 K는 대입 준비를 던지고 독일 유학을 떠난다. 단지 그 악기를 배우기 위해.

 

K의 무모함과 용기에 공감됐던 것은 나 역시 그 악기와의 만남이 전율이고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악기,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 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30년 전, 프랑스 영화 ‘ 세상의 모든 아침’을 통해서다. 영화에는 17세기 중반, 프랑스를 배경으로 비올라 다 감바와 운명의 늪에 빠진 세 사람이 나온다. 아내가 죽자 오두막을 지어 비올라 다 감바와 함께 죽는 날까지 칩거한 천재 연주자 쌩뜨 꼴롱브, 꼴롱브의 제자로 궁중음악가가 되었으나 평생 스승의 음악혼을 탐하고 질시하며 고통받는 마랭 마레, 아버지처럼 연주자가 됐으나 아버지보다, 비올라 다 감바보다 더 사랑했던 마레에게 배신 당해 죽음을 선택한 딸 마들린.

 

영화는 이 세 사람, 운명의 불협화음을 비올라 다 감바에 실어 예술의 비밀을 일러준다. 위대한 예술은 인생의 고통과 고독을 담보로 한 것이라는.

 

마랭 마레가 평생 몸부림쳐 분투해도 스승의 연주에 가닿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꿈꾼 세속의 성공과 부귀영화가 준 안락이었다. 스승은 천상의 소리를 얻기 위해 삶의 온갖 악조건, 자폐적 성격으로 인한 고독, 세속의 희로애락에 감응하지 못하는 결벽성, 아내와 딸의 죽음이 할퀴고 간 끔찍한 고통 등을 담보해야 했다.(아, 인생은 그렇게 엄정하다. 모든 것을 갖게 하지 않는다. 당신이 아는 누군가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생각되는 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잘 모르는 것일 듯!)

 

비올라 다 감바의 현 위에서 연주된 세 사람의 인생 이야기라 영화 내내 그 낮고 무겁고 애절한 음률이 점령한다. 내내 듣다 보니 처음 접한 낯선 악기라는 것도 잊게 된다. 비올라 다 감바는 약 500년 전인 16세기에서 17세기, 유럽 귀족사회에서 연주되던 고악기다. 첼로의 전신이라고 하지만 줄이 더 많이 달리고 (첼로는 4현, 비올라 다 감바는 5-7현) 기타처럼 지판에 프렛이 달려있는 등 다른 점이 많다.

 

‘감바’란 무릎이란 뜻으로 비올라 다 감바는 ‘무릎 사이에 놓고 연주하는 비올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음량이 작아 화려한 음색의 첼로에 밀려 음악 역사의 밤으로 사라졌는데 알랭 코르노 감독이 세상의 모든 아침으로 다시 끌어냈다. 영화는 프랑스 국내 영화제로 최고 권위를 갖는 세자르 영화제 7개 부문 수상,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명실공히 월드무비가 됐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청춘이었다. 그때는 음악만 들렸다. 몸의 통점을 모조리 찾아 건드리는 그 소리에 미칠 것 같았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다시 보니 사람이 보인다.

 

천재 쌩뜨 꼴롱브가 특별한 재능 없는 제자 마랭을 받아들인 이유가 그의 고통을 읽고 나서라는 것, 딸이 죽자 생의 전부이던 활을 놓아버린 것 등의 장면이 비올라 다 감바 소리보다 크게 다가온다. 인생보다 예술이 위대하다는 것을 사랑 없는 예술은 공허하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덮어버렸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김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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