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68 - 대청도 고래이야기(2)

2022.03.10 09:01:35 15면

1918년 대청도에 동양포경주식회사 출현까지

 우리나라 고래잡이의 시작은 국보로 지정된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서 비롯된다. 태화강 건너편 깍아지른 암벽(셰일과 혼펠스로 구성)에는 바다, 육지 동물의 모습, 수렵이나 어로 도구 등 신석기인들의 희망을 모아 바위에 쪼아 새겼는데 그 중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 고래’ 등 다양한 고래의 모습이 이채롭다.

 

이 유적의 연대는 견해차가 있지만 지금부터 7000~3500년 전이라고 하니 인간과 고래의 관계는 상당히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역사로 말하면 문자사용 이전에 해당하는 선사시대 중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동물을 바위에 새긴 이유는 생업이나 풍요기원 등 풍요와 안전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염원의 표현이었다.

 

신석기 시대 이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조선시대는 포경(捕鯨)에 관한 인식이나 기술의 부족, 관리의 수탈이 심해 오히려 포경 활동은 외면받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관아의 수탈 때문에 어민이 고래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떠밀려 온 고래가 발견되면 백성을 동원해 해부시키고 그 수익금은 관아에서 독점했으므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생사를 무릅쓰고 고래를 사냥해 보았자 역시 관아의 수탈이 막심하므로 사냥 의욕을 상실했고 고래잡이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내용 또는 19세기 말 이사벨라 버드 비숍(I. B. Bishop)이 ‘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어업은 모든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노동수익의 지나친 불안정성과 관리들의 횡포로 마비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조선의 어업인은 어떠한 이유나 또는 이유 없이도 어차피 빼앗길 돈을 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점으로 보아 포경 기술은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이런 사례를 통해 볼 때 일본 포경선이 들어오기 이전 우리나라 포경 기술은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이며, 태풍에 의해 밀려온 고래를 여러 척의 소형 선박이 협동해 얕은 곳으로 몰아넣고 (작살로) 찔러 잡은 수준이었다. 이렇듯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원양의 신항를 개척한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에서의 포경산업은 황금어장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한반도에 처음 포경산업으로 진출한 나라는 1894년 러시아였다. 께이제를링그백작,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블라디보스톡에 께이제를링그 백작 태평양 포경회사를 설립하고 노르웨이에서 포경선 2척(게오르기, 니꼴라이)을 구입해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러시아의 포경업은 동해안 울산 장생포를 중심으로 약 10년 간에 걸쳐 독점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자신들이 선점했던 포경장 역시 일본에게 빼앗기게 됐다.

 

일본 포경선의 한반도 진출은 러‧일전쟁 이전이지만 당시 일본의 기술은 포(咆)를 이용한 노르웨이식 포경이 아니라 재래식 작살과 그물(網獲法)을 이용하고 있어 포획수가 많지 않았다. 일본 역시 러‧일전쟁을 계기로 큰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러시아의 께이제를링그 백작 포경회사 선박 3척을 나포함과 동시에 포경회사를 통폐합해 1904년 10월 일본 최대의 포경회사인 동양어업주식회사를 시모노세키에서 설립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노르웨이식 포경이 붐을 이뤘고, 포경회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에 포경회사들의 구조조정에 의해 1909년 4월 오사카에 본점을 둔 대규모 포경회사인 동양포경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동해안에 4개의 사업장을 두고 활동했으며 이 당시 한일 양국에서 5~7월에는 253두, 10~이듬해 1월까지는 322두를 포경했다. 하절기는 고기의 변질 때문에 1두에 600여 원, 동절기는 3000~6000원 정도했다.

마침내 이 회사는 장거리 이동에 따른 고래의 부패 등을 고려해 우리나라 각지에 사업장을 확대했다. 서해의 전라도 쪽으로는 1916년 대흑산도, 1918년에는 황해도 대청도까지 포경사업장을 설치했기에 대규모 서해안의 포경사업 확대가 가능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청도의 고래잡이는 시작됐고, 그 포경의 중심지가 배(선)진동이었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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