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72-대청도 행정과 경제의 중심, 선진동(船津洞) 이야기

2022.04.27 21:20:13 15면

 선진동은 대청도 유일의 동쪽 해안선에 자리잡은 양항(良港)으로 행정구역상 옹진군 대청면 대청2리이며, 일명 배진포라 불리다가 현재는 선진포(船津浦), 선진동(船津洞)으로 불려지고 있다. 2022년 3월 기준 247세대, 384명으로 대청도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대청도의 문호(門戶)로서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연락선의 기항지(寄港地)이며, 현재 대청도의 발달은 선진동의 발달과 궤를 같이할 정도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20세기 이전에는 영감낭재 밑에 어막 같은 4~5가구의 집만 있었을 뿐 한촌(寒村)에 불과했으며,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내동에 비해 인구수나 경제 규모가 절반에 미치지도 못했다.

 

그러나 1918년 일제에 의해 선진포에 포경회사가 들어서고, 이 항구를 서해 어업의 거점으로 삼게 되면서 경제 규모가 커지고 대청도의 중심지도 농업 중심의 내동에서 어업 중심의 선진동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특히 1920년대부터 광복 이전까지 고래잡이가 가장 대표적 어업활동이었다.

 

대청도 포경회사의 사업 시기는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대체로 추운 겨울에 영업을 했다. 대청도 일대에서 포획한 고래는 참고래, 대왕고래, 혹등고래 같은 대형수염고래류인데 이 기간은 수온 조건이 4~26℃이며, 태평양 크릴새우와 같은 풍부한 먹이가 많아 고래의 서식 조건에 매우 적합했기 때문이다.

 

어업이 활성화하면서 1923년에는 어업조합(조합장 김학선)이 설치돼 백령‧대청‧소청도의 3개 섬 중에 대청도가 가장 먼저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발달하게 됐다. 한편 짧은 기간이지만 100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 노무자를 상대로 접객 행락의 인파가 일시적으로 파시(波市)를 방불케 했다.

 

한편 선진포항은 포경산업이 번창함에 따라 1930년 1만 5000원의 공사비로 방파제를 수축하고, 또 1933년에는 다시 2만 원의 비용을 들여 증축‧보수하는 등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해상 교통면에서도 1926년 선진포운수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일본에서 복영환(福榮丸)이라는 40톤급 발동선을 구입해 선진포를 기점으로 백령을 경유, 장연군 덕동포를 운항하며 주민 교통 편익에 기여했다. 그 후 1931년에는 일본인이 10톤급 발동선 공영환(共榮丸)으로 같은 항로를 운항하다가 후에 김순호가 개인으로 32톤급 백령환(白翎丸)을 구입해 같은 노선을 운항하다가 장연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이외에 1930년대는 선진교회가 들어서고, 백령도보다 5년 먼저 1932년 대청공립보통학교가 선진동 논골에 세워지면서 대청도의 발전을 이어갔다.

 

1942년에는 대청도의 행정수요를 고려해 소청도를 포함한 면출장소를 선진동에 설치, 관청마을의 발돋움이 시작된 것이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38도선 이남에 있던 백령면 지역은 38도선 이북의 장연군과 분리되고 경기도 옹진군 소속이 됐다.

 

1950년 6‧25전쟁을 겪으면서 선진동에도 옹진반도로부터 많은 실향민이 정착하게 됐다.

 

1974년 7월 1일에는 대청출장소가 대청면으로 승격되면서 선진동은 면소재지가 됐고 아울러 선진포초등학교(1959년 개교), 우체국(1966년 개국), 파출소(1972년 개소) 등 각종 시설물과 함께 더욱더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다가 면사무소까지 들어서면서 명실상부한 대청도의 중심지가 됐다.

 

2021년 7월까지 21명의 면장이 역임했다. 선진동 일대의 자연 지명으로는 영감낭, 소당골, 소당고개, 내려바지, 논골(畓洞), 자작나무골, 첫산골짜기, 검은낭, 검은낭뿌리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청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33년 도민들은 김학선을 위해 선진동 언덕에 ‘김학선선생송덕비(金學善先生頌德碑)’를 세웠다. 그 옆에는 그의 동생 ‘김학필옹기념비(金學弼翁記念碑)’가 나란히 서 있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이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며 세운 ‘망향비’도 김학선, 김학필 형제의 비석과 같은 곳에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망향비(望鄕碑)

“내 고향 산천은 잡힐 듯이 눈앞에 아롱대지만 갈래야 갈 수 없는 내 고향 언제나 저 하늘 아래 이 발을 딛고 조상님께 성묘 드리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멀고 아득한데 바람 소리 파도 소리는 우리들의 흉금을 두드리는구나. 제2의 고향 이 섬에 몸을 담은지도 어언 삼십일주년. 도민들에게 입은 은혜 태산 같은데 잠시인들 잊으리. 아-민족의 운명이니 어이할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다 바쳐 통일, 단결하자 전진하자 백두산 영봉까지.”

 

비문은 이상수가 지었고 건립위원은 김윤식, 김경득, 이호신, 장경석, 양수한, 김동현, 김정금이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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