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북묘(北廟)의 푸닥거리 – 무녀 박조이와 민비 [갑신혁명의 길 1]

2022.06.13 06:00:00 16면

 

-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사대주의(事大主義)

 

 

- “민(閔)중전(中殿)을 잡아내라!” 왕이나 민비는 폭동 군중들이 그렇게도 벼락같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치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수문장이나 무예별감은 폭동군중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모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

 

박춘명의 소설 『임오군란』의 한 장면이다. 김주영의 『객주』는 군란의 시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식량을 급료로 받아든 군병들은 경악했다.

 

- 이 곡식 자루를 한번 들여다보게. 곡식 자루에서 뜬내는 안 나고 갯내와 먼짓내 뿐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갈 끼니가 되겠는가? -

 

정부재정은 민씨 일파의 손에 있었고 세도가(勢道家) 민겸호는 이에 대한 전권을 발동하고 있었다. 쌀로 세금을 내는 미납(米納)제도이기에 군병들의 급료도 쌀로 내주게 되어 있었는데 정부재정 부족을 이유로 급료 지불은 무려 10개월이나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는 솟구치는 군병들의 불만을 누를 수 없어 내어준 배급쌀은 대부분 폐미(廢米)에 다를 바 없었고 모래도 섞여 양과 무게를 속인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들 군병의 분노는 어찌 되었겠는가? 안국동의 민겸호 집이 이들에게 습격당하면서 군란(軍亂)의 불길이 일었다.

 

임오군란은 지배층의 탐욕이 극에 달한 조선 후기 봉건체제의 모순이 민씨 세도정치에 대한 불만과 겹쳐 터져 나온 사태이자 이로 인해 조선은 청과 일본 사이에서 겉잡을 수 없는 내정(內政) 혼란을 겪게 된다. 조정의 권세를 유지하는 길에 어느 외세와 손을 잡는가의 문제가 도드라진 국면이 펼쳐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대세는 청(淸)이 쥐고 있었고 임오군란의 수습 역시도 민씨 세력이 청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는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조선의 19세기는 파란의 세월이었다. 1811년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홍경래의 난(亂)’은 1894년 동학 농민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농민항쟁의 신호탄이었다. 1862년 진주민란은 충청, 전라, 경상도 전체를 엮는 삼남(三南)의 규모로 확산되었고 이는 조선조 후기 세도정치의 폐해와 착취, 수탈의 극심함을 보여주는 사태였다.

 

어디 그뿐인가. 프랑스 함대가 진격해온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해온 신미양요(辛未洋擾)는 조선의 국제적 운명을 뒤흔들고 있었다. 병인양요가 일어났던 같은 해인 1866년,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의 제너랄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은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朴珪壽)의 지휘 아래 격침으로 종료되었다. 그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 실학의 관점에서 개혁정치를 지향하고 있었다.

 

박규수는 대동강에 침몰한 제너랄 셔먼호를 건져 올려 함선연구를 지시하는 것과 함께 도탄에 빠진 민생구제를 위한 방도에 골몰했다. 그는 진주민란 때 영남 안핵사(按覈使)로 임명이 되어 민란의 원인이 봉건 지배층의 수탈에 있음을 파악했던 바 있다. 박규수는 그 전 해에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淸)에 가서 1857년에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의 후과를 목격했기에 외세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는 노력과 동시에 서구제국의 발전과정에 대한 학습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원권의 폐쇄적 대외정책인 위정척사(衛正斥邪)에 반대하면서 주체적 개방의 길을 제시했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과는 달리 제2차 아편전쟁에서는 북경이 영국과 프랑스에 함락되어 청조(淸朝)는 열하(熱河)에 피신한 형편인 걸 보면서 대응의 방식에 변화가 와야 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 1864년 고종의 즉위는 그의 친부(親父) 대원군의 등장을 의미했고 대원군의 강력한 지도력은 왕권을 약화시켜온 안동김씨의 세도와 사대부들의 전횡을 혁파함으로써 민중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에 더하여 외세에 대한 강경일변도의 배척정책은 결과적으로 국가발전에 결정적 치명타를 가했지만 그 과정에서는 자주의 기치를 기반으로 청의 속방(屬邦)처럼 되어 있던 조선의 국격 변화를 시도하는 노력을 한다. 이는 그와는 내정개혁에 대립적이었던 김옥균이 임오군란 이후 청에 납치되었던 대원군을 귀환시키는 운동을 펼치는 근거가 된다.

 

 

김옥균은 대원군에 대해 “섭정(攝政) 국부(國父/대원군)는 완고하지만 그 정치는 정대(正大)하다. 청이 국부를 속여 납치한 것은 국토를 유린하고 국민을 모욕하며 조선의 왕가를 노예로 삼아 나라의 면모를 유린한 행위다.”라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한다. 그는 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격파하지 않고서는 국정의 개혁은 없다고 본 것이다. 이는 훗날 갑신정변(1884년)의 중요한 동기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씨세력은 당시 천진에 가 있던 김윤식에게 파병을 요청하게 했고 청은 군을 보내 임오군란 이후의 정세를 진압했으며 군영(軍營)에 초청하는 것처럼 해서 대원군을 천진의 이홍장 앞으로 끌고 가버렸던 것이다.

 

-무속(巫俗)정치, 박조이의 출현

 

한때 지상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대원군의 시대는 이로써 종막을 고했고 민씨세도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임오군란 당시 성난 군중들에게 쫓긴 민비는 변복(變服)하여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던 바 있다. 민응식은 이 일로 이후 군왕 다음의 권력을 쥐었다는 세평을 들었던 민영익의 부 민태호와 함께 민씨세도의 두 거두(巨頭)가 되고 이 둘은 세도정치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척족(戚族)정치의 분쟁요인이 된다.

 

그런데 이 민응식은 민비에게 무녀 박조이(朴召史, 본명 박소사로 읽지 않고 ‘과부댁’이라는 뜻을 가진 ‘조이’라는 칭호로 불려진 여인)를 소개하는데 이 박조이는 점을 쳐 민비가 조만간 환궁(還宮)할 것을 예언한다. 아니나 다를까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일이 그리 풀리자 민비는 박조이를 서울로 데려가 길흉화복을 점치게 하는 역할을 맡기고 이른바 신령군(神靈君) (또는 진령군(眞靈君)이라고 하기도 한다)에 봉해진다. 점술사가 내놓고 궁정에서 활개를 치도록 한 것이다.

 

 

박조이는 이후 13년간이나 엄청난 권세를 가진 세도가가 되었고 그녀가 신령군으로서 역할을 했던 북묘(北廟)에는 권문세가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왕가 직속의 제단이 설치되고 왕비직할의 기도소까지 차려졌다. 이곳은 왕비, 그러니까 민비의 수복(壽福)을 비는 곳이라 권세에 아부하는 자들이 줄을 지어 진수성찬의 잔치를 벌였고 때로 하루에 기만냥이 들어가기도 했다고 하니 이렇게 국고가 탕진되고 있는 판국에 민중들의 삶은 당연히 도탄에 빠져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북묘(北廟)란 어떤 곳인가? 임오군란이 진압된 이듬해인 1883년 고종이 지금의 혜화동 인근에 세운 관우(關羽)를 위한 제사터였다. 참으로 난데없는 일인데 이는 조선왕조가 관우를 군신(群神)으로 모시는 중국의 속방임을 말해주는 것이자 푸닥거리 귀신놀음으로 날을 지새는 형국을 보여주는 셈이었다. 이리되니 왕실 전유(專有)의 금고라고 할 수 있는 내탕금(內帑金)은 날로 고갈되어 갔으며 이걸 채우라는 채근으로 악화(惡貨)의 양산과 민중의 착취는 멈출 줄 모르게 되었다.

 

『고균(古均) 김옥균 정전(正傳)』은 다음과 같이 당시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 궁중은 마치 전국 무당 기도사(祈禱師)의 집합소같이 되었으며 신령군의 문중에서도 이 제사 기도의 시중을 들기 위해 온 집안이 떼를 지어 상경하였다. 가짜 승려, 가짜 무당들이 몰려들었으며 왕궁의 내탕금은 무당, 판수, 역술을 보는 승려들 속으로 구멍뚫린 솥에 물 새어나듯 흘러 들어갔다. 궁정의 내탕금은 이러한 푸닥거리와 공양 기도행사로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왕비당(王妃黨)에는 무관(無冠)의 신령군이 있었으며 온갖 모사꾼들이 몰려들었다. 황금세월을 만난 무당, 판수, 역술 승려들만이 발호(跋扈)하고 있었다.”

 

 

나라는 청에 무릎 꿇고 독립과 자주권을 헌납하고 있었으며 궁정은 무녀의 천지였으며 경제를 살려야 할 주화(鑄貨)정책은 악화의 범람으로 조선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경험하고 있던 개혁 청년들이 그대로 가만히 있을 턱이 있었겠는가?

 

-갑신혁명으로 가는 길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 조정의 외교와 세관업무를 맡고 있던 독일 외교관 묄렌도르프(Möllendorff)는 청의 조선 내정 간섭 요원이기도 했고 민씨 척족세력과도 강력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묄렌도르프는 세관 수입이 국가의 공적 자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왕실 금고에 집어넣는 일을 계속해댔다. 국정에 쓰여야 할 국가재정이 누수(漏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김옥균이 그를 이렇게 힐난한다.

 

“당신은 해무총무(海務總務)라는 중임을 띄고 있으며 또 외무아문(外務衙門)의 협판(協辦)이다. 그런데 무슨 권한으로 해무수입의 일부를 내탕금으로 헌납하고 이를 외국 교제의 비목(費目)이라고 조작하는가. 당신이 하는 일은 여염(閭閻)집의 반찬꺼리 거래하듯 제멋대로 하니 이게 어디 국사(國事)인가?”

 

 

김옥균은 박규수의 집에 드나들면서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을 탐독하고 귀족 계급의 지배에 대한 비판의식과 평등사상을 길렀고,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안목을 틔워갔다.

 

 

여기에는 중인(中人) 역관(譯官)으로 새로운 정세인식에 밝았던 오경석(吳慶錫)과 오경석의 맹우(盟友)이자 사상적 깊이가 남달랐던 유대치(劉大致/본명 유홍기/劉鴻基)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대변혁의 정치를 꿈꾸고 있던 청년 김옥균에게 오경석은 이렇게 조언한다.

 

 

“먼저 동지를 북촌(北村/서울 북쪽 양반 계급의 거처)의 자제들 가운데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진작시켜야 한다.”

 

김옥균, 박영호, 박영교,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 등은 이렇게 모이게 되었고 당시 2~30대였던 이들 젊은 혁명지도자들의 앞날은 험난한 길을 돌파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근세사 최초의 혁명이자 비록 실패했으나 이후 갑오개혁의 물꼬를 텄고 실학의 정치개혁,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외교, 외세와의 관계, 혁명의 민중적 기반 등에 걸쳐 매우 중요한 반성의 토대가 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정의 혁명적 혁파에 사상적 기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언해주는 거사(巨事)였다.

 

사대주의와 무속정치를 배격하고 봉건적 착취의 현실을 청산하려는 ‘자주독립과 합리적 개혁정치’를 지향했던 김옥균은 조선이 “아시아의 프랑스”처럼 되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고 이는 당대의 현실에서 상상을 넘는 시대적 이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성급한 모험주의와 외세에 역이용당한 정세판단의 오류가 김옥균과 그의 정변계략을 비판하게 하고 있으나 부패한 현실에 침묵하지 않고 감연히 떨쳐 일어난 그 담대한 용기는 불멸(不滅)의 역사다.

 

훗날 훼절했지만 당시로서는 카프 문학의 맹장이었던 팔봉(八峰) 김기진(金其鎭)이 1934년 발표한 『청년 김옥균』은 혁명이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는 배 위에서 쏟아내는 박영효의 탄식에 김옥균이 대답하는 대목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 어찌 될 것인지, 지금 암흑 한 가운데서 내다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태양이! 태양이! 광휘를 발할 때라야 전도(前途)가 보이겠지요.”(그러자 김옥균은 이렇게 응대한다.) “우리들이 태양이 되는 거지요. 우리들이 빛을 발하면 됩니다. 이천만 동포들이 다 잠들어 있을지라도 그리하면 장래를 개척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옥균의 망명생활은 참담했고 그 끝은 상해에서의 암살이었다. 태양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일까? 아니다. 그가 남긴 족적(足跡)을 뒤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조선혁명의 역사가 어떻게 태동했는지를 알게 된다. 현실의 실패가 역사의 소멸은 아니다.

 

“부득불 대경장(大更張)이 있어 정부를 개혁해야 국가의 주권이 존중되고 민생이 보존된다. ”오늘날 이 요구는 ‘시민권력의 획득’을 뜻한다. 권력의 독점과 그에 기인한 불평등의 구조를 타파하는 권리를 시민들이 되찾아야 바로 된 세상이 만들어진다.

 

궁정에 무당 기도사들을 불러 모으는 북묘를 차려 무속정치가 난리를 피우고 사대주의로 외교라는 걸 하고 검(檢)이라는 관직이 적힌 관모(官帽)를 쓴 자들과 어느 일가의 척족세력이 쥐락펴락하는 세도정치가 이 시대를 지배하려 든다면, 그건 수명이 짧은 시대착오로 귀결될 뿐이다. 미몽(迷夢)으로 국정을 어지럽힌 세력의 권세는 미몽으로 끝난다. 무녀 박조이와 민비가 짝짜꿍이 되어 벌인 무속정치는 19세기로 그쳐야 한다. 아니면 그건 좀비다.

 

 

 

 

 

 

 

 

 

 

 

 

 

 

김민웅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