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행 칼럼] 브라만 좌파

2022.07.07 06:00:00 13면

 

 

이즈음 강남 좌파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계층을 일컫는 이 말은 전통적 계급이론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생산수단을 둘러싼 제 관계인 계급이론에 따르면 강남 좌파는 그저 소(쁘띠)부르조아일 뿐이다. 강남 좌파는 형용 모순의 조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강남 좌파란 말이 언론이나 담론 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강남 좌파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서 일까? 아니면 그보다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이 필요해서 일까? 말이 새롭게 태어나고 사멸하는 것은 역동적 인간 삶에 있어 자연스런 일일 터이다. 하지만 강남 좌파의 사멸을 인과 관계적으로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담론 장에서 등장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브라만 좌파란 말이 주목을 끈다.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유래한 브라만은 중세 유럽의 3신분(전사·사제·평민) 사회에서 제2 신분인 사제를 뜻한다. 이런 브라만은 현대 사회에 있어 종교지도자뿐만 아니라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 교수 등 지식인을 총칭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브라만 좌파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말 그대로 브라만에 속하면서도 우파가 아닌 좌파인 사람들을 일컫는다. 기득권의 이익보다는 약자의 이익을 옹호하며 당연히 공동선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강남 좌파와 엇비슷하거나 좀 더 확장된 개념이다.

 

그러나 브라만 좌파란 말에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깃들어 있는 점이 낭만적 뉘앙스의 강남 좌파와 크게 대비된다. 정의와 공정 등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가치를 자신의 존재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내세우지만 이는 구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브라만 좌파는 자신을 고상한 가치로 치장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토마 피케티는 사례와 통계 위주의 명저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프랑스 브라만 좌파들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 행위를 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유리한 사회적 지위를 통해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익이 되는 교육 제도를 관철시켰다. 이는 그들이 깃발처럼 내세우는 가치에 정면 위배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한국의 광범위한 브라만 좌파들은 정의와 공정을 부르짖은 만큼 그것을 이행하고 있을까?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있는 기성 언론을 조금만 톺아봐도 그렇지 않다는 팩트가 넘쳐난다. 자녀들의 교육과 취업 문제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부동산 등 모든 영역에서 정의와는 거리가 먼 불공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담론 장에서 한국 브라만 좌파를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한 하나의 계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진보니 좌파니 하는 말들은 영혼 없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쁘띠부르조아에서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쪽으로 진화를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타락한 것일까?

 

 

이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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