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자, 당신은 누구야? 당신의 얘기를 해 봐

2022.07.07 11:06:26 16면

74. 큐어 -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 ‘큐어’에서 그려지는 도쿄의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화려한 네온사인 같은 것, 고층 빌딩과 사치스러운 쇼윈도 따위는 일체 나오지 않는다. 도시가 그렇게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워서 기이한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잇따른 정신이상의 살인 행위 때문에 도시가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살짝 구분은 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엽기살인 탓이 먼저인 것처럼 보이지만 언뜻 생각해 보면 공간과 시대가 사람을 죽고 죽이게 만들거나 죽이게끔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시는 심각하게 우울해 보인다. 공간 전체가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영화 ‘큐어’는 1997년에 나왔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초기작이다. 25년 만에 리마스터링 작업이 이뤄졌고 최근 국내에 재개봉됐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1990년대 후반 일본 사회가 겪었던 내면의 살풍경스러움이 느껴진다. 당시 일본 사회는 풍요로웠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내부적으로 이미 무너지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영화가 발표됐던 1997년보다는 2022년 현재, 일본 사회가 어디서부터 붕괴됐는지를 갈파시킨다.

 

실제로 일본 경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그 거품이 빠지기 시작해 장기 불황의 늪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시대적 불안증이 영화 전편에 깔려있다.

 

 

영화 속 엽기 살인의 주인공인 마미야 쿠니히코(하기와라 마사토)는 자신의 희생자들에게 늘 이렇게 묻곤 한다. “당신은 누구야? 뭐라고? 누구라고?” 그래서 나는 누구다, 내 이름은 뭐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이다 식으로 답하면 철저하게 아랑곳없이 다시 묻는다. “그러니까 누구라고 넌?” 짜증나는 선문답을 주고받기를 몇 번, 사람들은 마미야가 묻는 게 그냥의 내가 아니고 나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 마음속에 담겨 있는 욕망의 실체를 직접 꺼내서 마미야 자신 앞에 진열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미야는 묻는다. “자, 이제 너의 얘기를 해 봐.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

 

도쿄에서 원인 모를, 살해 동기를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운 살인사건이 잇따라 일어난다. 여관방에서 창녀가 살해되는데 평범한 회사원이 그 여자를 죽였다. 쇠 파이프로 머리를 가격했지만 사인의 직접적인 원인은 목에서부터 가슴까지 X자로 난자당한 상처 때문이다. 당연히 경동맥이 잘렸고 과다 출혈로 죽었다.

 

 

초등학교 교사의 착한 아내도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된다. 범인은 남편이다. 이들은 단란하고 화목한 신혼의 부부였다. 동네 파출소에서 평범한 순경으로 살아가는 남자도 어느 날 이유도 없이 같이 근무하던 젊은 경관을 총으로 쏴 죽인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X자로 목과 가슴을 도려낸다. 병원에서 성실히 일하던 여의사도 남자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던 남자를 죽이고 X자로 얼굴과 가슴을 도려낸 후 얼굴 가죽을 벗기다 사람들에게 목격된다. 다들 미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상 행동을 해댄다.

 

경시청에 근무하는 고참 형사 다카베(야쿠쇼 코지)는 이 일련의 살인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정신적으로 교사되고 있음을 직감한다. 최면술이 동원되고 있다고 직감하고, 그 같은 사술(邪術)의 장본인을 추적하려 기민한 수사 감각을 동원한다.

 

 

이 과정에서 친구인 정신과 의사 마코토(우지키 츠요시)의 도움을 받는다. 다카베는 곧, 범인이 18세기 오스트리아의 최면술의 창시자 프란츠 안톤 메스머의 추종자임을 알게 된다. 다카베는 결국 마미야를 검거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때부터 영화는 기이한 방향으로 롤러코스터를 탄다. 형사 역시 이 이상성격의 살인자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될 것인가. 주인공 형사까지도 살인 행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다카베의 아내 후미에(니카가와 안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다카베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바쁜 경찰 일정 탓에 늘 집에 들어오는 것이 늦다. 당연히 다카베는 후미에의 일상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다카베의 표정이 어두운 것, 그가 한 번도 웃지 않는 것도 그런 개인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카베는 정말 후미에를 걱정하는 것일까. 진짜 사랑하는 것일까. 혹시 간호와 돌봄에 지쳐서 그녀를 죽이고 싶은 욕망, 내심 그녀가 스스로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은 없는 것일까. 후미에의 정신과 주치의는 그런 다카베에게 말한다. “당신이 정신적으로 더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실제로 후미에가 정신 상담을 하러 와서 의사를 기다리며 읽는 책은 프랑스 동화 『푸른 수염』이다.

 

 

푸른 수염을 가진 부유한 성주(城主)는 어느 날 딸이 많은 가정의 막내딸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 알고 보니 성주가 전처 6명을 살해한 남자라는 설정이다. 남자는 새로운 아내에게 지하의 어느 방은 들여다보지 말라 했지만 여자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문을 열어 봤고, 거기에 전처들의 시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남자는 또다시 여자를 죽이려 하지만 여자의 가족과 오빠가 먼저 선수를 쳐 남자를 죽이고 성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사랑 따위는 없다.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과 발설할 수 없는 속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게 드러나는 순간 사람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는 행위에 몰입하게 만든다. 다카베의 본심은 무엇일까. 푸른 수염일까.

 

후미에는 주치의에게 책을 던지듯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난 이 책의 결론을 알아요”. 후미에는 다카베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범인으로 잡혀 온 마미야는 그런 다카베를 몰아세운다. ‘자, 너의 얘기를 해 봐. 당신의 진짜 얘기를 듣고 싶어’.

 

영화는 엽기 살인 행위에서 시작돼 다카베의 신경증, 노이로제와 불안증으로 옮겨 간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을 옥죄는 것은 끝없는 불안함이다. 상대가 어떻게 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어떻게 할까 몰라서 떨게 되는 공포심이다. 자신의 끝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방법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범인 마미야가 그렇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악마를 발견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가 붕괴되는 대신 그를 영접해 전도사가 되는 길을 택한 인물이다. 마미야는 다카베의 수사 결과 도쿄 외곽에 있는 무사시노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한 인물이다. 마미야는 끝까지 다카베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한다.

 

다카베는 아내 후미에를 살해하게 될까. 다카베의 정신적 흐름과 그 점층적 리듬이 이 영화 ‘큐어’의 핵심적 아우라다. 살인보다는 살인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간의 마음속 어두운 풍랑이 더 무서운 법이다. 살해라는 직접적 행동보다는 살의라는 인간 심연의 어두움이 더욱더 공포스러운 법이다.

 

영화 ‘큐어’는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1990년대 후반의 일본 사회가 사실 얼마나 깊은 사회적 살해 욕망과 욕구를 품고 살았는가를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풍요와 번영은 다 소용없는 짓이다. 내면이 중요하다. 평범한 척하는 가면의 얼굴 안, 진짜 표정이 더 중요한 법이다. 사회라면 더욱더 그렇다. 체제와 시스템으로 안정적인 척 사실은 그 안에서 이미 붕괴가 시작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게 더 무서운 일이다.

 

자기 안의 공포를 인식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하는 사회가 맞이하는 결과와 결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1997년에 2020년대의 일본을 예감한 셈이다. 영화가 결말로 가는 과정,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의미심장하다. 자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얘기를 해 보라. 그것도 진짜 얘기를. 너는 누구냐?

오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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