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행 칼럼] 말이 고통인 시대

2022.08.04 06:00:00 13면

 

 

"또 한 놈 나온다. / 국회의원 나온다. /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 가래끓는 목소리로 웅숭거리며 나온다 /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공약 휘휘감고 혁명공약 모자쓰고 혁명공약 배지차고”

 

지난 5월 작고한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에 나오는 구절이다. 1970년 발표된 이 시에서 오적은 재벌과 국회의원, 장성, 장차관, 고급 공무원 등을 일컫는다. 오적에 각각 개견(犬) 자를 붙인 한자 조어로 풍자의 극치를 이룬 이 담시가 실린 책은 오랫동안 불온서적이었다. 대학 시절 선배에게 복사본으로 받아 읽고는 낯섦에서 오는 충격을 가눌 길이 없었다. 미끈한 언어의 나열을 시라고 생각했던 고정 관념이 흔들렸으나 형언할 길 없는 쾌감도 있었다.

 

판소리를 현재화한 담시의 형식미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은 무엇보다 말을 막는 시대 탓이 컸다. 광주 학살을 통해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문제 제기적인 모든 말을 유언비어로 몰아 족쇄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말은 봄날 대나무 죽순 뾰족하게 솟듯이 여기저기서 삐져나왔다.

 

"전두환을 ×× 죽이자", "전두환 ×새끼", "광주 원흉 대머리", "피는 피를 부른다", "네 심장에 칼을 꽂으마", "네가 죽는 그날까지"....

 

대학가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오가는 역이나 버스터미널 화장실은 모진 말의 향연장이었다. 추한 말은 곧 시대의 묵시록이었다. 시이자 대서사이자 아름다운 상징어였다. 추(醜)의 미학이 생성된 생생한 현장이 아니겠는가? 추함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독특하고도 뼈아픈 시대를 우리는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당하지 않은 권력이 가둬놓은 말은 추를 통해 형장에서 양지로 걸어 나왔다. 말의 생명력은 이처럼 상상을 초월한다. 말을 막는 어떤 권력도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실증적 사례를 다름 아닌 우리가 만들었다. 사르트르가 자전적 소설 『말』에서 말한 바대로 말은 인간다움의 산물 아닌가.

 

그런데 말이 자유를 얻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펼쳐지고 있다. 우리 스스로 말을 나락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살고 있는 평산 마을에서 쏟아내고 있는 보수 유튜버들의 말은 옮겨 적는 것 자체가 폭력일 것이다. 이들 뿐인가?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모진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프레임에 입각한 막말을 일상적으로 하는 정치권 인사들이 초라하게 느껴 질 정도다. 말의 자유가 말의 진흙탕이 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지금 우리의 아름다운 말은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이다.

 

말 짓눌렀던 시대에 있었던 추한 말은 말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추의 미학이란 말은 그만큼 정당하다. 그런데 말을 막지 않는, 막을 수 없는 시대에 있어 추한 말은 말의 기능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자체가 추일뿐이다. 게다가 우리의 삶을 품격에서 비루함으로 이끈다. 바야흐로 우리는 말의 성찬이 고통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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