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윤의 좌충우돌] 서로의 착각

2022.10.18 06:00:00 13면

 

 

1. 그의 이야기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렸어요. 핏기 없이 희고 창백한 얼굴이었죠. 신비로웠어요."

 

일본 농부라 자신을 소개한 그는 그녀를 회상했다. 네팔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여자에게 묘한 떨림을 느꼈다 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숙소에서 시작된 한일 간 운명적 러브스토리였다. 차마 고백할 용기가 없던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뜻밖에 그녀였다.

 

여자는 일본 지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을 도와 달라 부탁했다. 그녀가 불러주는 안부를 일본어로 옮기면서 심장은 쿵쾅거리고 손은 떨렸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밤을 붙잡으며 새벽녘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다음날 그녀는 사라졌다. 이른 아침 체크 아웃을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떠났다고 했다.

 

절망감에 그는 사라진 그녀를 찾아 다녔다. 강기슭을 따라 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 기적처럼 그녀를 발견했다.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그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 주변에 몰려든 네팔 꼬마 아이들과 뒤섞여 노는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재회했다.

 

그는 내게 이국땅에서 운명처럼 만난 신비한 사랑에 대해 비밀을 속삭이듯 털어놓곤 다시 길을 떠났다. 하지만 영원히 묻히지 않는 비밀처럼 수개월 후 나는 “그녀”를 만났다.

 

2. 그녀의 이야기

 

시커먼 매연과 공업용 오일과 인도 향신료 냄새가 뒤범벅, 트럭, 버스, 릭샤가 뒤엉켜진 인도 자이푸르 거리였다. 적도의 땅 인도에서 검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새하얀 얼굴을 보자 그녀임을 직감했다.

 

낯선 곳, 길 위에서, 모국어가 통하는 여행자를 만난 반가움인지, 쉴 새 없이 자기 이야기를 쏟아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우울함이나 신비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한 자이푸르의 밤 밀려오는 피곤함에 스르르 눈이 감기려던 그때,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문을 열었다.

 

"네팔 포카라 안나푸르나 가보셨어요? 일본 청년을 만났는데 글쎄 직업이 농부래요"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네팔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숙소에서 그를 만났다. 맑고 선한 눈빛의 일본 청년에게 사랑을 느꼈다. 애틋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를 때 묘안이 떠올랐다. 일본인 친구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구실로 그의 방을 찾아간 것이다. 어색한 순간도 잠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날이 새는지도 모를 만큼 대화를 나누다 방으로 돌아왔는데 바지는 피로 젖어 있었다. 월경이었다. 자신이 걸터앉았던 그의 방 소파에 남았을지 모를 흔적을 원망하며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떠났다.

 

옮긴 숙소는 하필 세면대가 고장 나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빨랫감 들고 강으로 나와야 했다.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바지를 빨고 있을 때 네팔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와 떠들었다. 귀찮게 졸졸 따라오는 훌리건들을 쫓아내려다 멀리서 자기를 응시하며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그였다.

박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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