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의 관규추지(管窺錐指)] 꼭 뭐라도 해야 해?

2022.11.24 06:00:00 13면

 

 

당연한 말이지만, 광고는 시대를 반영한다. ‘대한민국 1%가 타는 차’라는 광고가 차를 이동 수단이 아니라 신분을 과시하는 도구라는 점을 부각할 때,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한 뒤였다. 그리고 요즘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광고를 만난다. 모 그룹 이미지 광고는 이렇게 말한다.

 

“목표가 생기면 뭐라도 하게 되고, 뭐라도 하다 보면 한발 더 나아가게 되지.”

 

이 광고 문구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근면성실 또는 대부는 재천이요, 소부는 재근이라는 도덕률에 기반한다.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다. 작위가 부작위보다 도덕적으로 현실적으로 우위에 있는 행동규범이고, 그것은 결국 너를 발전시켜줄 것이란 믿음, 하지만 그게 정말 옳은가, 생각해 볼 때가 됐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공시생을 가르치는 강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그저 공시생이란 신분을 위해서 장시간 학원에 다니는 분들입니다.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백수로 노느니 시험 준비 중이란 말을 듣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 거죠. 부모님들도 이 학생들을 그저 학원에 방치하는 겁니다. 합격 가능성도 없이 몇 년씩 학원에 비싼 돈을 갖다주는 분들이 가장 안타까워요.

 

어릴 때 필자는 걸핏하면 공상에 잠겨 시간을 보냈다. 나는 나중에 뭐가 될까. 초콜릿은 왜 초콜릿이라 부를까.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봄이 올 수도 있잖아 등등,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온갖 것들을 상상하며 시간을 죽였다. 개미가 줄을 지어 어디론가 가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고, 낙숫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정말 바위를 뚫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면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얘야, 그러고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하렴. 뭐라도 하라는 건 결국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었을 건데,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꼬마의 학업성적이 별 볼 일 없던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필자는 과히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지키려고 했다. 아이에게 뭐가 되거라 말하지 않았고, 공부해라 소리도 하지 않았다. 공부든 독서든 그 어떤 생산적인 일이라도 자기가 내키고 하고 싶어야 하는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공상 좋아하던 꼬마가 자라 지금 내가 됐고, 중학교 때까지 전교 200등을 맴돌던 아이는 나중에 서울대 정시에 합격했다.

 

종내 말당이 되고 말았을지언정, 어쨌든 우리에게 시의 세계를 열어 보여준 서정주가 고백했듯, 나를 키우는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뭐라도 하렴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지향 없는 삶은 지리멸렬해지기 쉽다. 하지만 그 지향이 올바른 관계에서 길러진 게 아니라면, 맹목적인 지향의 종국은 피폐와 물신숭배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삶은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리기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뭐라도 하라고 윽박지르지 말자. 쫌!

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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