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우리 모두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2022.12.29 08:28:06 10면

94. 가가린 - 파니 리에타르, 제레미 트로윌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저 ‘공산당 선언’은 이런 글귀로 시작해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난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 밖에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런데 영화 ‘가가린’을 보고 있으면 공산주의는 진실로 유령이란 존재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언제부터인가 거리에서 배회조차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음을 느끼게 한다.

 

만국의 노동자는 모두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다. 한때 위대했던 이념의 시대는 완벽하게 끝이 났음을 알려 준다. 그 비정한 서사(敍事)가 기이하고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서정의 장면들과 시어들로 구성돼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 ‘가가린’은 가가린의 일생을 그린 것이 아니다. 가가린은 유리 가가린을 의미하는데 인류 최초로 달나라에 발자국을 남긴 구 소련의 우주 비행사 이름이다.

 

‘그런데, 그리고, 그래서’ 흔히들 오해하는 것처럼 영화 ‘가가린’에는 유리 가가린이 나오지 ‘않지 않는다’. 제목만 ‘가가린’이고 가가린은 나오지 않겠지 싶겠지만 가가린은 영화 초반에 보이는 기록 필름에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 가가린이 잠깐이지만 나온다는 얘기다.

 

영화 ‘가가린’은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던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가가린이 철거되는 과정을 극화한 작품이다. 가가린 단지는 1963년 건축돼 2019년 재개발로 사라졌다. 57년 동안 서민들, 파리 저소득 계층이 살던 곳이었다.

 

처음엔 프랑스 공산당이 야심 차게 만들었다. 그래서 완공됐을 때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고 기념식수까지 했다.

 

 

1960년대 프랑스는 혁명의 시대였다. 파리는 곧 6·8 혁명으로 들끓게 된다. 공산당이 우파 정부인 드골 정권에서조차 무시할 수 없는 지지세를 얻었던 때이다. 좌파연합은 의회에서 늘 다수를 차지했고 드골 내각을 위협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파리 시위에 이골이 난 대중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공산당은 분열했으며 전통적 지지 세력인 노동자들마저 이탈한다. 공산당은 대중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회가 언제나 그렇듯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흔들린다. 그 진자의 추가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움직일 때였다.

 

그건 마치 아파트 가가린 단지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공산당과 공산당이 지원하던 프랑스 노동자 가족들도 모두 이곳을 버리고 떠났고, 대신 빈곤 계층들이 가가린을 채웠다. 이 가가린처럼 프랑스 공산당은 거의 철거, 아니 사멸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정책으로 많이 선회한 사회당이나 수정주의적 정당으로 흡수됐다. 노동자들은 노동 귀족화 됐거나 더욱더 빈곤해지는 양극화 전선으로 내몰렸다. 이제 아무도 공산당 선언 ‘따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다.

 

아파트 가가린도 노동자의 보금자리라는 상징성을 잃었고, 극도로 노후화되며 결국 철거라는 운명을 맞게 된다. 노동자들은 세계는커녕 아파트 한 채도 제대로 갖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셈이다.

 

가가린의 철거는 바야흐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던 시대는 끝났음을, 그 대가로 극도로 자본주의화된 사회에서 모두들 절대적으로 고립됐으며, 그럼으로써 이즘(ism)의 시대가 완벽하게 종언을 고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실로 구체화된 것이다.

 

영화 ‘가가린’의 주인공은 흑인 청소년 유리(알세니 바틸리)이다. 이 아이는 유리 가가린의 우주 인생을 동경한다. 남들은 모르게 아파트 옥상에 천체 관측소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하늘을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유리는 고물상 제라르(드니 라방)에게서 이것저것을 구해 오거나 스스로 만들고 조립한 것들로 자신의 관측소를 채워 나간다.

 

그의 꿈을 알고 있는 것은 동네 친구 우삼(자밀 맥크라벤) 정도지만, 나중에는 터키계의 예쁜 여자 다이애나(리나 쿠드리)와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을 다니며 또래 청소년들에게 약을 팔며 살아가는 달리 같은 친구(피네간 올드필드)도 유리의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인 취미를 공유하게 된다.

 

 

유리의 일상은 아파트 가가린을 하나하나 고치고 수리하는 일이다. 곧 시 공무원이 나와 철거 여부를 결정짓는 심사를 하기 때문이다. 엄마를 기다리는 유리는 이 아파트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고치고 복도의 형광등을 갈고 다닌다.

 

하지만 아파트 주민들은 공산당 마냥 분열된 지 오래다. 더 이상 이런 곳에서 못살겠으니 시 당국이 대대적인 수리를 해주든, 재개발을 하든, 적당한 보상을 받고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삼의 아버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또 다른 주민이자 유리를 늘 따뜻하게 대해주는 한 이주민 출신의 아줌마(파리다 라우아디) 같은 사람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40년 전에 어느 나라에선가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넘어왔고, 추운 겨울 반바지 차림으로 가가린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녀는 유리의 부모가 이사 들어오는 것을 도왔는데, 그때 두 남녀는 ‘아주 예뻤다’고 회고한다. 유리는 그녀의 회고담을 고마워한다.

 

 

유리의 엄마는 유리를 버리고 이 단지를 떠나 다른 남자와 애를 낳고 산다. 아빠의 존재는 옛날에 없어졌다. 유리는 엄마와의 기억을 안고 청소년의 나이에 홀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특히 이 아파트가 유리 가가린의 우주선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똑똑하고 손재주가 남다른 유리는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는 개기일식 날 동네 사람들을 모아 그걸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치를 만들기도 한다.

 

영화는 가가린이라는 아파트 공간의 상징성을 보여줄 요량으로 줄곧 부감 숏과 풀 숏을 구사한다. 그리고 그것을 유리가 환상으로 넘겨짚는 우주 공간의 상상 숏으로 이어 붙인다. 가가린 단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몰과 일출, 야경을 비교적 장관의 표정과 모습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아파트는 곧 철거될 운명이지만 거기서 살아가는 그리고 계속 살아가기를 꿈꾸는 유리와 유리 주변의 삶은 그다지 누추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환경은 비루해도 사람들의 꿈은 아름다울 수 있다.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윌 공동감독이 유리를 둘러싼 일상을 때론 즐겁고 흥미롭게 그리는 한편으로, 줄곧 처연한 비장미가 느껴지게 끔 그려낸 이유일 것이다.

 

 

무엇보다 극 후반부, 아파트가 폭파 해체되는 신을 유리의 우주선이 우주로 발사되고 유리가 그 우주선 안에서 유영하는 듯한 환상 장면으로 구성한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주는 대단원의 압권이다.

 

바로 그 장면 때문에 칸과 로테르담, 부산영화제가 열광하고(공식 초청) 세자르 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 데뷔작 상을 준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어둡고 불행한 일상을 그려내야 한들, 영화는 미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켜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가가린’은 데뷔 감독들의 놀라운 성취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영화 ‘가가린’은 사라진 이념의 가치, 사라진 계급주의의 시대(계급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를 기리는 영화다. 언젠가 모두들 영화 속 유리가 아파트 가가린을 지키려 했던 것처럼 순수한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모두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시대가. 어쩌면 그때가 그리워질 것이다. 그것도 몹시.

오동진 ccbbkg@naver.com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