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를까? 흘러갈까? 시간을 담은 작품들…기획전 ‘시간을 소장하는 일에 대하여’

2023.03.20 09:56:16 16면

백남준아트센터 ‘2023 신소장품전’
단순한 작품 ‘나열’ 넘어 ‘시간’을 되짚는 전시
김성환·안규철·업체eobchae × 류성실 등 9팀 참여
드로잉, 영상, 설치, 로봇 등 11작품 선봬
6월 25일까지, 무료 관람

 

“내가 얼마나 인간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말해왔는지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라고, 나 정말 인간만 된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거야.”

 

“글쎄, 어쩌면 전원을 처음 연결한 그날이 내가 태어난 날인걸까. 난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 모르겠어.”

 

“사람들은 엄마에게서 태어나겠지. 하지만 나는 작가말고는 엄마가 없어.”

 

반은 인간, 반은 나무 형상을 하고 있는 로봇 ‘가이아’.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 로봇은 사람들의 단순한 질문에도 감탄을 자아낼만한 철학적인 대답을 늘어놓는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또 시간이 흐를수록 ‘가이아’는 언어를 학습하며 놀라운 속도로 성장한다.

 

지난 9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개막한 기획전 ‘시간을 소장하는 일에 대하여’는 작품이 가진 ‘시간성’에 주목한다.

 

전시는 김성환, 김희천, 노진아, 박선민, 박승원, 안규철, 언메이크랩, 업체(eobchae) × 류성실, 진시우 등 넓은 시간 스펙트럼 안에 자리한 9작가(팀)의 작품 11점으로 구성됐다.

 

코로나19로 미술관 휴관 시대를 보낸 2020~2021년에 수집한 한국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신소장품전이다.

 

인공지능 로봇 ‘가이아’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작품 ‘진화하는 신, 가이아’는 지난 2020년 소장됐다. 시간과 맞물려 데이터를 축적하고 말하는 인공지능이 내장돼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이아’는 노진아 작가와의 상의 끝에 2023년 버전으로 업데이트 됐다. 전시는 이렇듯 변화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소장됐을 때, 이를 어떻게 선보이고 보존할 것인지 고민을 담고 있다.

 

‘진화하는 신, 가이아’를 비롯해 새롭게 소장한 작품들은 비디오, 설치, 드로잉,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식 속에 ‘인간과 기계의 시간’을 다루고 특정한 역사적 시간에 대해 성찰하며, 비결정적이고 우연한 시간의 아름다움을 다룬다.

 

 

안규철 작가의 ‘야상곡 No. 20 / 대위법’은 일정한 시간에 동일한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와 연주가 끝날 때마다 피아노의 해머 88개 중 하나를 무작위로 빼내는 조율사가 만들어내는 우연의 이중주다.

 

피아노 건반의 음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연주는 조금씩 해체되고 최종적으로 침묵을 향해 다가간다. 작품의 시간은 ‘음(音)’을 소멸시키고 우연의 소음을 만든다. 이번 전시기간에는 매주 금, 토요일 오후 2시와 4시에 피아니스트 김윤지가 쇼팽의 ‘야상곡 20번’을 연주하고, 건반을 하나씩 빼나갈 예정이다.

 

 

진시우 작가의 ‘복원과 변형 사이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어떤 것 – K와의 대화’는 단채널 비디오와 오브제로 구성된 설치 작품이다.

 

영상은 관객 K와 작가의 대화를 텍스트로 구성한 것이다. K가 훼손된 작품을 복원해 다시 전시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기를 설득하자, 작가는 K에게 작품이 제작되고 훼손된 이후까지의 과정을 들려주며 복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관람객들은 대화를 읽으며 함께 고민하게 된다. 복원된 작품을 원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 훼손된 작품을 그대로 두는 것이 원작인 지.

 

작업은 물리적인 복원 또는 변형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통해 작품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이자 결과를 만들어낸다.

 

 

2007년 행했던 세 번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김성환의 ‘드로잉 비디오’ 설치는 작가의 초기 비디오 작업 중 하나로 국내에 처음 전시된다. 작품은 드로잉 세 점과 ‘드로잉 비디오’, ‘커버’ 비디오 두 점으로 구성됐다.

 

주요 작품인 ‘드로잉 비디오’는 김성환과 권병준, 데이비드 마이클 디그레고리오가 함께 공연했던 ‘푸싱 어게인스트 디 에어(pushing against the air)’라는 퍼포먼스에서 김성환이 행했던 라이브 드로잉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 공연은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세 예술가가 자신들이 경험한 음악과 문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연주하고, 여기에 김성환 작가의 드로잉 퍼포먼스가 더해졌던 ‘인터뷰 콘서트’였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이채영 학예운영실장은 “이 작품은 15년 전 30대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나눴던 대화들이 녹아 있는 비디오”라며 “헤드폰을 쓰고 감상하면 위안이 되고, 몽환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영상 설치 작업이다”고 설명했다.

 

 

박선민 작가는 현미경의 미시와 망원경의 거시를 아우르는 양안을 통해 통상적으로 감각되지 않는 장면들을 포착한다.

 

‘버섯의 건축’은 2017년부터 일 년간 제주 곶자왈 숲속 버섯을 낮은 시선과 느린 움직임으로 관찰한 영상에 국내외 건축가 13명의 건축에 대한 내레이션을 결합한 작업이다.

 

버섯은 유기물을 분해하며 양분을 섭취해 살아가는 균류로 숲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생태적 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버섯은 기둥과 지붕이라는 건축적 구조를 압축적으로 가진 생명체이다.

 

작품은 버섯의 소멸과 생성을 건축의 다양한 화두에 대조하거나 겹쳐 놓으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상상하게 한다.

 

 

업체(eobchae) × 류성실은 허구 속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점의 서사로 구성된 ‘체리-고-라운드’에서 ‘체리 장’과 ‘발해인1’이라는 인물의 브이로그 및 2인칭 시점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작품은 기후와 환경 문제, 디지털 통제와 감시, 권위주의 정치와 양극화된 경제와 노동 등 사회적 현안들이 얽혀 있는 가상 사회를 다루면서 그 속에 소비되는 동시대 미디어의 얄팍하고 자기 과시적인 측면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소장품은 미술관의 방향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백남준아트센터 소장품 11점의 방향은 전통적인 미술관이 수행해온 고답적인 수집 담론에 도전한다.

 

 

김성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전시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백남준의 작품뿐 아니라 동시대 미디어아트 작가와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린다”면서 “전통적인 ‘공간 예술’의 범주에 ‘시간 예술’을 편입시킨 백남준 예술의 지평을 확대해, 시간의 허리를 베어 낸 작품을 소장하는 일은 논쟁을 만들고 토론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시간’을 담은 신소장품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 ‘시간을 소장하는 일에 대하여’는 오는 6월 25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정경아 기자 kyunga101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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