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의 온고지신] 강완숙 골롬바

2023.06.09 06:00:00

 

1760년, 충청도 예산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서녀였다. 여자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대에, 완숙은 그 악조건에 굴하지 않고, 남자형제들 공부할 때 옆에서 성실하게 귀동냥했다. 훗날 학자들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 총명한 딸을 특별히 사랑했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가 사나운 팔자이니 재취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하여 부모는 결국 그 점괘를 받아들였다. 이내 향리에서 알아주는 양반집 홍씨네 며느리가 된다. 남편은 어린 아들 하나를 둔 사별한 홀아비였다. 

 

독한 시집살이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에, 양반집 며느리로서, 또 전처소생에게는 계모로서, 완숙의 덕행은 완벽했다. 자신의 딸을 포함하여, 남편을 제외한 4인 가족은 완숙의 헌신과 지혜 덕에 참으로 좋았다. 그는 고품격이었다.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행복은 짧았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비극이 들이닥쳤다. 망국적인 파당정치였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임금도 얼마든지 손을 볼 수 있었다. 노론 벽파가 자파세력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현군(賢君)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 그 한 사례다. 

 

그와 같이, 당파싸움에 몰두한 패거리들은 정적이나 위협세력은 필요한 경우에 얼마든지 개돼지 잡듯 잡아죽였다. 그들에게 나라와 백성들은 "회쳐먹고 찜쳐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는" 먹거리일 뿐이었다. 안전하고 부강하고 덕이 넘치는 나라로 발전시킬 능력도 비전도 없었다. 자존심 팽개친 거지처럼, 또는 시시하고 위선적인 왈패처럼 개인의 영달과 당파의 이익을 탐할 뿐이었다. 

 

천주교가 정치의 뜨거운 재료로 등장했다. 초기에 서학(西學)이라고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서양에서 전래된 신학문으로 여겨졌다. 조정에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학은 천주교로 옷을 갈아입는다. 성리학의 세상에 그 대칭의 세계관이 등장한 것이다. 평등주의와 내세관이 핵심사상이었다. 

 

임진ㆍ정유 8년 전쟁에 이어 끝도 없이 지속되는 내우외환의 조선은 "평생 백 가지 질환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중환자"(임경업 장군 어록)였다. 지배층의 권위가 무너진 상태에서 천주교는 그 마력적인 교리로 기층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완숙은 어려서부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스무살이 되기 전에, 비구니 학승들이 사는 절에 들어가 삶의 의미를 멈춤 없이 따지며 깊이 파고 들었다. 1년 후, 만족하지 못한 채 하산했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의 전교능력은 탁월했다. 공맹사상에 조예가 깊은 점이 주효했다.

 

그는 '윤지충 패륜사건'(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웠음)으로 발발한 신해박해(1791년) 때 감옥에 갔던 교우들에게 음식을 해나르다가 첫번째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 남편과 헤어지고 시어머니와 아들 딸과 함께 서울 회현동으로 이사하여 본격적인 전교활동을 펼친다. 

 

조선은 2천년 천주교 역사를 통틀어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선교사가 파견되기 전에 교세를 갖추고, 그 교도들이 선교사를 갈급히 요청하여 성사된 나라라는 점이다. 1호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밀입국한다. 1794년 12월이었다.

 

신해박해의 여파로 주신부의 선교활동은 살얼음판 행각이었다. 밀고로 통역 최인길, 측근 윤유일과 지황이 끌려가서 신부의 소재에 관한 심문에 함구하다가 장살(杖殺:매맞아 죽음) 당하자 이혼과부 완숙이 신부를 자택에 은닉했다.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물경 6년이었다. 

 

정약용 채제공 등 남인 출신 인재들과 높은 팀웍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던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그가 죽은 것(1800년)이다. 열살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순조다. 소년은 정순왕후(영조의 후처)의 컨트롤을 받는 꼭두각시였다. 

 

노인은 "천주교는 사론(邪論)이다. 씨를 말리라"는 어명을 선포한다. 이것이 신유박해다. 그 조치는 다섯 집가운데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나오면 모조리 처벌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핵심이었다. 전국을 감시와 밀고의 지옥으로 만든 것이다. 이로써 정약종 이승훈 이가환 이벽 등 선구자들 100여명이 참수되고, 평신도 400여명이 사형당했다.

 

주신부는 이 위험천만한 시기에 그를 최초의 여신도 회장으로 임명했다. 능지처참 당한 황사영은 백서에 "조선의 카톨릭 역사에서 강완숙의 공을 따를 사람은 없다"고 썼다. 그는 여섯 차례의 주리를 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의연했다. 형리들은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아들 필주도 같은 고문을 당하면서 배교의 기미를 보이자, 내세를 포기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모자는 함께 참수당했다. 

 

주문모 신부는 국경까지 도피했으나, "네가 지금 어디로 가느냐.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한양으로 돌아가서 "내가 당신들이 찾는 그 신부다"며 자수하고 참수당했다. 

 

이 나라의 종교단체들은 좋게 말하면 상업기관이고, 정확히 말하면 사기집단이다. 물론 소수의 예외는 있을 것이다. 천주교는 그 엄중하고 피빛 찬란한 역사의 연장선에 있는가. 강완숙 골롬바의 크기와 높이, 깊이를 기대한다.

오세훈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