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행 칼럼] 명품 가난

2023.06.12 06:00:00 13면

 

단편 소설 '도둑맞은 가난'의 작가 박완서 선생이 살아 있다면 김남국 사태를 보고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특권층의 가난 코스프레는 코스프레로 명명하기조차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1975년에 발표된 소설은 부자들이 많은 걸 갖췄는데도 그것으로 부족해 가난까지 치장 품으로 두려는 세태를 비판한다.

 

미싱사인 화자는 도금 공장에 다니는 상훈과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동거에 들어간다. 그런데 상훈은 쥐꼬리만큼 월급을 받는 공장 노동자 답지 않다. 씀씀이가 헤픈 것이다. 미싱사는 상훈을 심하게 나무란다. 그러던 상훈은 한동안 잠적했다 나타나 자신을 대학생이자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소개한다. 가난을 경험해보라는 부모의 명에 따라 잠시 공장에 다녔다고 고백한다.

 

미싱사는 상훈의 말을 듣고 자신의 부모가 가난해지면서 부자에게 휘둘려 가족 네 명이 자살했던 절망보다 더한 절망을 느낀다. 그녀는 소설에서 백미로 꼽히는 혼잣말을 한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해 본 일이 없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이런 70년대의 가난 코스프레는 김남국의 명품화한 가난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부잣집 아들이 밑바닥 삶을 경험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애교 수준인 까닭이다. 그런 체험은 한편으로는 장려해야 하는 일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국회의원 김남국은 아예 자신을 가난한 사람으로 연출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가난을 내세워 후원금을 모으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상 화폐 사건으로 김남국의 가난은 새빨간 거짓으로 밝혀졌다. 수십억 원대, 1백억 원대 자산가가 아니고는 그의 투자 규모를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FIU(금융정보 분석원)이 검찰에 통보했겠는가. 돈세탁 방지 사정 조사 기관인 FIU가 의심이 되어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는 경우는 고작 0.18%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 김남국이 거액의 수상한 돈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방증이다.

 

FIU라는 기구가 없었다면 정치인 김남국은 탄탄대로를 밟았을 게 뻔하다. 가난한 정치인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불철주야 불사르는 진보적 정치인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인물의 등장 자체는 금권의 한국 정치사에서 초유의 대사건일 것이다. 뛰어난 현실 정치인이었던 김대중과 노무현을 간단하게 뛰어넘는.

 

부유층이 진보를 부르짖는 이른바 강남 좌파나 브라만 좌파, 리무진 리버럴과 김남국은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내세우지만 자신들을 가난한 자로 은폐한 적이 없는 반면에 김남국은 아예 자신을 가난한 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초선인 김남국이 각광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난을 명품으로 발명한 대가라면 대가인 셈이다.

 

우리 시대를 탈진실의 시대라고 말한다. 사실과 진실보다는 거짓 프레임, 진영주의가 인간 뇌의 한계인 확증 편향을 노골화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김남국의 명품 가난은 그 눈부신 성과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탈진실을 녹이는 백신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상비약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일이다. 의심이라는 백신을.

이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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