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우리 진짜 독립한 거 맞아?

2023.09.18 10:48:53 16면

129. 1947 보스톤- 강제규

 

강제규의 신작 ‘1947 보스톤’은 잘 숙성된 작품이다. 코로나 3년을 기다렸다. 영화는 보통 사과 같은 과일과 같아서 창고에 오래 두면 부패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1947 보스톤’은 먹기 좋을 만큼 잘 익은 영화가 됐다.

 

출하시기가 나쁘지 않았던 덕이다. 의외로 시대 상황과 잘 맞는다. 맞춤형 양복처럼 완성도도 좋다. 너무 요란하지도, 너무 투박하지도 않게끔 재단됐다. 테일러의 재봉질 솜씨가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단골손님들을 만족시킨다.

 

 

‘1947 보스톤’은 1947년 보스턴 국제 마라톤에 출전한 한국 선수 서윤복의 이야기이자 그를 훈련시킨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의 이야기이다. 손기정은 다 알다시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뛸 수 밖에 없었던 금메달리스트였다.

 

이때 남승룡은 동메달을 땄다. 손기정이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사건, 동아일보의 한 기자가 그렇게 ‘주도한’ 보도사진이 문제가 돼 이후 그는 영영 마라톤을 뛰지 못했다. 1936년은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일 제국주의의 군부는 눈이 미쳐서 돌아갔을 정도로 식민 통치를 강화했을 때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나라는 독립이 됐다. 손기정은 민족의 영웅이지만 여전히 마라톤을 뛰지 못한 한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 선생으로 살아가는 남승룡(배성우)의 제안으로 손기정(하정우)은 달리기에 천부적 소질을 선보이는 서윤복(임시완)을 키우게 된다.

 

셋의 목표는 그다음 해에 열리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무엇보다 참가 선수권 자격을 따야 한다.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비용의 참가비도 마련해야 한다. 마라톤 협회 같은 단체도 없었던 때이다. 모두들 못 먹고 못 살던, 빈궁한 시기였다.

 

훈련장, 훈련 시설은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저 고개 마루나 언덕을 다 헤진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게 고작이었던 때이다. 국제 마라톤 대회는 언감생심이었던 시대다. 저개발의 기억이 최고조였던 때이다.   

 

 

1947년은 1948년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있기 전인 해이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남북한 모두 미국과 소련의 주둔군(군정)에 의해 ‘통치’되는 민족에 불과했다.

 

남쪽의 미 군정은 사령관 하지 중장이 통치했으며 남한은 아직 공식 국호가 공표되지 않아 여전히 조선이라 불렸다. 남한의 경우는 어쩌면 여전히 일본의 무단 통치가 연장되고 있었던 셈이다.

 

제주도에서는 4.3사건이 시작됐으며, 대구에서는 1946년 10월 1일에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나라가 말 그대로 흉흉하기 이를 데 없던 시기이다. 남한 지역은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 극심한 혼란을 겪던 때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희망이 필요한 시기였다. 모두들 무엇인 가에 집중하고 매달려야 할 때였다. 현실의 시름을 잊을 수 있는 무엇인 가가 필요한 때였다.

 

‘1947 보스톤’은 영리하게도 불우하고 불행했던 시대의 이슈들을 영화 이야기의 외곽으로 빙 둘러 병풍을 치는 전략을 짠다. 스포츠 드라마가 갖는 ‘장르적 관습(상업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 구조)’을 앞으로 내세우며 시대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숨긴다.

 

사회 역사적 리얼리티는 아는 사람들만 알아듣거나 궁금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가게끔 하게 만든다. 상업영화의 재미로 역사영화의 의미가 지닌 줄기를 더듬게 만든다. 강제규가 잘 하는 연출 수법의 장기이다.

 

 

그는 줄곧 전쟁 액션 영화의 방식으로 민족 분단의 이야기와 민족주의의 이슈를 건드려 왔으며(‘태극기 휘날리며’, ‘마이 웨이’) 가족영화의 틀로 분단의 아픔을 제기해 왔다.(‘민우씨 오는 날’, ‘장수상회’) 이번엔 스포츠로 민족과 민족주의의 얘기를 전개해 간다.

 

강제규의 민족주의는 일종의,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민족주의이다. 지나치게 인위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다. 박제화 돼 있지 않다. 그가 생각하는 민족주의는 살아 있는 것, 활기차고 재미있으며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속에서 보이는 그의 미국관이 그렇다. 전후 세대인 그가 생각하기에, 미국에는 착한 미국인과 못된(차별주의자인) 미국인이 있다는 것이다. 극 중에서는 미 군정 사무국의 여성 스매들리(모건 브래들리)와 하지 중장(론 켈리)으로 대비된다.

 

스매들리는 차별적 시선 없이 마라토너 셋을 도우려 애쓴다. 하지 중장은 이들 셋에게 선수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대한문(덕수궁) 앞에 보스톤 마라톤 출정식 겸 기념행사에 모였던 군중들은 그런 (미 군정 사령관의) 태도에 분노한다.

 

 

극 중에서 서윤복은 마라토너가 되기 전 온갖 허드렛일을 해 가며 살아간다. 그는 달리기를 잘하는 만큼 배달 일에 능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배달하는 음식점의 국수 한 그릇 제대로 사 먹을 돈이 없다. 그에게는 간질환에 걸려 죽어가는 어머니가 있다.

 

어린 서윤복의 삶은 궁핍하고 비참하다. 그는 종로 거리에서 음식 배달을 하다 부딪힌 미군과 시비가 붙는다. 그는 미군을 상대로 주먹을 날리며 저항을 한다. 그가 미군 얼굴을 한대 치고받을 때 이상한 쾌감이 느껴진다.

 

소극적인 에피소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들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했는지는 판단하기가 애매하다. 아마도 현대역사를 다룬 많은 영화들의 상당수가 그렇듯이 사실적 자료에 근거를 두긴 했어도 ‘윤색의 윤리학’을 지키는 선에서 살짝 만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건 감독의 시선이 담겨 있다는 얘기이다. 감독이 굳이 캐릭터의 대비(스매들리 여사와 하지 중장)를 만들거나 주먹싸움의 에피소드를 만든 건, 미국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우회적으로나마 담고 싶었던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1947 보스톤’이 적기에 출하된 과수원의 사과마냥 시대적 공기에 부합돼 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다. 현재는 한미일 공조다 뭐다 해서 국가 정체성의 균형 추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다. 사람들은 ‘1947 보스톤’같은 역사 스포츠 영화에서 미국에 대한 정치적 시선까지 읽어 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손기정 등은 나라가 독립을 했으면 마라톤의 기록도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태극기 마크를 가슴에 달 수가 없다. 그들이 보기에 한국=조선은 여전히 독립되지 않았다.

 

셋은 가슴에 태극기 마크를 달기 위해 이국 만 리 먼 땅 보스톤에 절박한 호소를 쏟아 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가 진정으로 독립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영화는 묘하게도 주인공 셋의 그 같은 간절한 소망이 지금 2023년에도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는 진정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일본으로부터 과연 진정으로 해방됐으며 미 군정의 종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가. ‘1947 보스톤’은 기묘한 방식으로, 그리고 돌고 돌아 우회적으로 바로 그 같은 정치적 질문을 쏟아 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 보스톤’은 영화 곳곳에 재미의 긴장을 마치 사슬의 이음처럼 단단하게 연결해 나가는 작품이다. 중간중간 이런 류의 영화가 갖는 특유의 장면들 마냥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의 민망하고 인공적인 에피소드도 있다.

 

대체로 그런 부분은 극 전체의 리듬감으로 드라마적 재미를 복원해 나간다. 그 톤 앤 매너가 좋다. 극 후반 30분 가까이 이어지는 보스턴 마라톤 장면은 한마디로 휘몰아친다. 무엇보다 매우 정직하면서도 정통의 기법으로 찍혀졌다.

 

배우 임시완과 배성우에게 주어진 주문도 서윤복처럼, 남승룡처럼 ‘그냥’ 달리라는 것이었던 셈이다. 후반의 마라톤 시퀀스는 마치 42.195㎞의 마라톤 실제 경기를 축약해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보는 관객들도 마치 자신들이 뛰고 있는 것 마냥 흥미롭다.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 장면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사명’에 충실한 영화이다. 마라톤 장면만으로도 충분한 볼 거리를 제공한다.

 

보스턴 마라톤이지만 호주에서 찍었다. 구간구간 보이는 1947년의 보스턴 거리 풍경은 죄 CG이다. 그 기술력과 디테일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프로덕션의 세 공력, 곧 미술과 소품, 의상 분장의 역할이 뛰어났다는 것, 그 전체를 디자인한 연출의 섬세함이 남달랐음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사소한 영화가 있고 사소하지 않은, 그래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비중이 높은 영화가 있을 뿐이다. 좋은 영화지만 사소할 수 있다. ‘1947 보스톤’은 좋은 영화이면서 동시에 사소하지 않은 영화이다. 역사적 진심이 담겨져 있는 영화이다. 누선(淚腺)을 자극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오동진 krh0830@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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