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식 칼럼] 리좀형 세계와 지경학

2023.11.01 06:00:00 13면

 

1990년대 초 탈냉전 이후 미국 일극의 시대가 되자 미국은 세계화를 추진하였다. 자유시장경제 체제와 자유무역을 전 세계로 확장함으로써 세계를 단일 시장으로 통합하고 미국이 그 중심에 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자 세계화에 역행하는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9.11 사태, 세계 금융위기, 중국의 부상,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 전쟁 등. 왜 세상은 미국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가?

 

21세기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시대라고 한다. 그는 플라톤 이후 2천 년 서양철학을 본질주의에 입각한 “동일성 철학”이라고 비판하고, 본질 뒤에 감춰진 현실 세계의 참모습을 긍정하는 “차이의 철학”을 주장하였다.

 

동일성 철학은 뿌리를 중심으로 줄기, 가지, 잎으로 분화하는 “수목형” 사유를 기반으로 한다. 수목형 사유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수직적 위계적 질서를 부여한다. 그 중심은 뿌리, 즉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보편적 진리인 본질, 실체, 이념 등이다, 줄기, 가지, 잎 등 차이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차이의 철학은 뿌리, 즉 중심이 없이 수평으로 접속, 연결하는 “리좀형” 사유를 토대로 한다. 리좀이란 감자처럼 줄기가 땅속에서 뻗어나가는 땅속줄기 식물을 말한다. 리좀형 사유는 수평적 접속을 통해 생성되는 새로운 실체, 즉 차이를 긍정한다. 리좀형 사유는, 인터넷 및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철학을 넘어 예술, 문학, 건축, 영화, 교육, 경제 등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1세기는 수목형 질서와 새로운 리좀형 질서가 혼재하여 생동하는 변혁의 시대다. 그러나 이에 대처하는 미국의 국가 전략은 수목형에 머물러 있다. 세계화 전략과 대중 디커플링 전략은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적 가치를 과대평가하고,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수평적 탈중심성을 과소평가하였다.

 

미국의 전략이 수목형에 편향된 이유는 역사성 속에 있다. 이념 중심의 냉전 시대에 강화된 정부 내 안보 관련 기능은 계속 유지되고 있으나,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거치면서 정부 내 경제적 두뇌가 허약해졌다.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유럽연합의 디리스킹 전략을 차용하는 등 국제문제에 대한 의제 설정 역량이 부족해졌다.

 

남북 분단 상황에 있는 한국은 미국보다 더 이념 편향적이다. 현 정부의 대북·대중 정책은 특히 더 그러하다. 리좀형 세계 경제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한 국가안보 관련 조직을 혁신하지 않고 대북·대중국 강경책을 장기화한다면, 이로 인한 폐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위험이 있다.

지경학은 경제적 교류를 통한 상호의존의 호혜적 수평적 ‘관계 형성’에 관한 사유인 점에서 리좀형 사유와 근접한다. 지경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관계를 ‘관리’하는 문제에도 통찰력을 제공한다. 지경학은 탈중심성, 불확정성의 리좀형 세계에 부합하는 국가 전략이다.

임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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