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 읍내에 가면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유배를 왔을 때 묵었던 주막이 초가집으로 복원되어 있다.
1801년 12월 엄동설한에 40세의 다산 선생은 이곳 시장 골목에 있는 초라한 주막에 도착했고, 이때 늙은 주모가 건넨 밥 한 그릇을 먹고 차가운 냉방에서 유배 첫 날을 보냈던 집이 사의재(四宜齋)이다.
다산 선생은 정조대왕의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동부승지와 형조참의라는 당상관직의 높은 벼슬에 재직하다가 하루아침에 옥에 갇히는 죄수가 되었다. 다행히 감형이 되어 이곳 강진에 유배를 오게 되었다. 함께 구속되어 심문을 받았던 정약전 둘째 형은 흑산도로 귀양을 가고, 정약종 셋째 형과 매부인 이승훈은 사형을 당하는 등 한 가문이 일시에 폐족(廢族)이 되었다.
이러한 엄혹한 여건 속에서도 다산 선생은 새롭게 마음을 다잡아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그 좌우명으로 다산 선생은 네 가지 덕목을 실천하기로 작정하였다. 첫째, 생각은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하고, 둘째, 외모는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하고, 셋째, 말은 과묵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넷째, 행동은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더디게 해야 한다. 그가 거처하였던 사의재(四宜齋)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마땅하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움으로 제어함을 말한다.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 와서 학문에 대한 자신의 뜻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사의(四宜)를 내세워 스스로 채찍질 하면서 오랜 귀양살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500여 권의 금쪽과 같은 저서를 발간하는 커다란 업적을 냈던 것이다.
다산 선생은 57세(1818년) 때, 유배가 풀려서 8월에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본가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해 봄에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완성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도 지방 수령이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가질 뿐이지, 어떻게 목민(牧民)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비판하였다. 그래서 “지도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반(半)이고 그 나머지 반은 목민(牧民)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때의 목민(牧民)은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이고, 심서(心書)는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지만 몸소 실천할 수 없으므로 ’목민심서‘로 이름을 정한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다산 선생이 강조하였던 네 가지 마땅함, 즉 담백한 생각, 단정한 외모, 과묵한 말, 신중한 행동을 실천해야 하며, 평소에도 늘 자신을 닦아야(修身)하고, 애민(愛民)정신으로 공평무사하게 국민들을 다스려야 한다.
요즈음 국회의원들과 정치인들의 막말과 반대만을 위한 적대적 발언이 난무하고 있다. 국회(Parliament)는 오직 말로써 국민을 대변하는 곳이다. 보다 세련되며 가다듬은 언어로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며 민주주의 절차에 입각한 국정을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다산 선생의 네 가지 마땅함의 덕목이 새삼 떠오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