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통신] 카자흐스탄은 왜 고려인의 나라인가?

2024.09.09 11:30:20 16면

한국에서 직선거리로 5천여 km 떨어진 카자흐스탄.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감이 훨씬 더 멀게 느껴지는 국가다. 거기에서 한발 더 들어가 ‘크즐오르다’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순간 일반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크즐오르다는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줄기가 모여 아랄해를 향해 흘러가는 시르다리야강 하류에 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북방 초원의 유목문화와 실크로드 오아시스 농경문화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어서 역사적으로 유목과 농경민들 간 교역의 중심지였다.

 

 

한때 카자흐스탄의 수도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당시 원당사범대학, 고려극장, 신문사 등이 이전해 왔던 곳이다.

 

필자는 광복절을 며칠 앞둔 8월 중순, 홍범도 장군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주지역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어 구성된 ‘홍범도의 길 탐방단’ 안내를 맡아 이곳을 방문했다.

 

 

이날, 탐방단과 함께 코르큿 아타 크즐오르다 국립대학교 학생들과 독립유공자 후손, 고려인 협회 간부 50여 명은 홍범도 장군 동상에 헌화하고 조국을 위한 그의 헌신적 삶을 돌아보았다. 단체 참배를 마친 후 참가자들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장군의 제단 앞에 정성껏 보드카 한 잔을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떤 이는 큰 절을 하기도 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연해주마저도 손아귀에 넣겠다는 야욕을 보이자 일본과의 전쟁을 염려한 소련의 스탈린 정부는 연해주에 살던 우리 동포들을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러시아 혁명과 적-백 내전 시기 연해주를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일등공신이었던 한인 동포들은 하루아침에 ‘불순 민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중앙아시아행 기차에 실려야 했다.

 

홍범도 장군도 그때 카자흐스탄으로 실려 왔다.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 그는 일제에 의해 내려진 총기 수거령에 항거하여 주변의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이래 봉오동 전투의 대승을 이끌던 ‘나는 홍범도’가 아닌 평범한 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눈빛과 기백이 청년 시절과 다름없었고 이를 알아본 고려극장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태장춘에 의해 크즐오르다에서 다시 문을 연 고려극장 경비 책임자가 되었다.

 

 

홍 장군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943년 10월 25일 운명했지만 중앙아시아로 온 이후에도 옛 독립군 동료들을 챙기고 동포사회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그를 존경하던 고려일보 기자들은 그의 죽음을 신문 부고를 통해 알렸고 성금을 모아 기념비를 세웠다.

 

2021년 8월 14일, 장군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모셔간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매년 그의 기일엔 어김없이 제사를 지내고 있고 장군이 묻혔던 묘지는 추모공원으로 조성됐다. 장군과 함께 유해가 봉환된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의 옛 묘소도 그 옆에 잘 단장되어 있고, 그가 말년을 보낸 집도 기념공간으로 남아있다.

 

연해주에서 우리말과 글을 가르칠 수 있는 전문 교사를 양성하던 원동사범대학도 크즐오르다로 옮겨왔는데, 현재 코르큿 아타 크즐오르다 국립대학이 바로 원동사범대학이다. 이 대학은 최근 서울과학기술대학의 지원으로 ‘AI 스쿨’을 열고 크즐오르다 지역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 전역에서 유능한 과학 인재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우리를 맞은 누르잔 학장은 “9월에 서울과기대와 맺은 복수학위 협정이 발효된다”면서 “재학생 중에서 선발된 과학기술 영재들은 학부 3~4학년 과정을 서울과기대에서 마칠 수 있게 됨으로써 한국의 앞선 과학기술력과 교육시스템까지 배울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고가이 엘레나 한국어학과장은 “보다 효과적인 복수학위제 운용을 위해 현지에서 충분히 한국어 능력을 기르기 위해 이 대학 내에 한국어 과정도 열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에는 한국민이 잊고 있었던 우리의 과거가 과거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인 동포들의 삶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 되고 있었다.

 

 

이날 홍범도 기념공원 방문을 마친 일행들은 옛 고려극장(현, 크즐오르다 문화궁전), 선봉 신문사(고려 일보의 옛 이름)의 옛 사옥, 홍범도 거리, 독립운동가 계봉우, 최봉설 선생이 말년을 보낸 주택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서 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바이코누르에서 왔다”면서 “내년에도 또 만납시다” 고 말하는 최재형 선생의 증 외손자이자, 독립운동가 김학만 선생의 손자인 김 알렉세이씨 등 고려인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로 향했다.

 

크즐오르다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크즐오르다는 카자흐어로 ‘붉은 천막’이라는 의미처럼 짙은 회색빛의 건조하고 척박한 땅이었다.

 

 

그러나 천산산맥에서 발원해서 아랄해까지 2천여 킬로미터를 흘러가는 시르다리야 강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성공시킨 고려인에 의해 크즐오르다는 카자흐스탄 벼 생산의 90%를 담당하는 중앙아시아 최대 벼농사 지역으로 변했다.

 

크즐오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이 도시의 상징탑에 있는 벼 이삭 조형물과 크즐오르다 기차역 벽면에 그려진 벼 추수 장면은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이 이룩한 업적과 함께 이 나라에서 고려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알마티 공항에 내려 준비된 차량으로 곧장 시내로 향했다. 기존 구시가지를 지나야 하는 길 대신 공항과 도심을 바로 연결하는 ‘BOA’라고 불리는 새로 뚫린 도로를 타고 20여 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카자흐스탄 최대의 도시이자 중앙아시아의 항공 교통의 허브인 알마티는 고려인의 도시이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인 ‘카자흐스탄 호텔’을 비롯해서 최고 수준의 공연예술공간인 ‘공화국 궁전’, 어린 학생들의 꿈을 키우는 공간인 ‘소년궁전’ 그리고 이 도시를 천산산맥의 산사태로부터 지켜내고 있는 메데우 댐 등은 모두 고려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항과 도심을 바로 이어주는 도로는 카자흐스탄 3대 건설 회사중의 하나인 ‘AES’라는 회사가 시공했는데, 고려인 신 브로니슬라브씨가 오너인 회사이다.

 

또한 알마티에는 고려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시내 한가운데는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러시아의 문화 코드 그 (자체였던)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의 동상과 동계 올림픽에서 카자흐스탄에 최초로 메달을 선사한 빙상 영웅 ‘데니스 텐’의 동상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포브스지에서 발표하는 카자흐스탄 부자 50위 안에 무려 7명의 고려인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경제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자원 기업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최대의 가전 유통업으로 부를 이룬 김 에두아르드 테크노 돔 회장이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생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플랫폼 ‘카스피’을 운영하는 카스피은행의 오너 또한 고려인 김 베체슬라브 회장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4월, ‘포브스’지는 세계의 부호 랭킹에 들어간 억만장자 중에서 카자흐스탄의 베체슬라브 김 '카스피' 회장을 주목하라고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적으로 경제가 위축됐지만 런던 증시에 상장된 핀테크 기업 카스피의 주가는 상승을 이어갔고, 김 회장의 개인 자산은 33억 달러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카스피’의 시작은 소매금융을 위주로 하던 카스피 은행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현재는 결제, 커머스, 모바일 뱅킹을 제공하는 앱으로 진화되어 상업은행 서비스 외에도 세금과 각종 공과금, 범칙금 납부, 상품 구매, 여행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누구나 편리하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대부분의 카자흐스탄 국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거리의 걸인도 자신의 카스피 번호를 적은 푯말을 목에 걸고 구걸을 할 정도이다.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카스피 본사가 있는 알마티 시를 방문할 때면 김 회장과의 단독 면담을 잊지 않는다.

 

이 정도가 되면 ‘카자흐스탄은 고려인의 나라’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지난 8월 광복절 크즐오르다를 다녀온 후 드는 생각이다.

 

[글=김상욱 고려문화원장]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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