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해방된 사할린에서 한글을 가르치다

2025.06.16 13:43:25 16면

 

해방된 사할린에서 한글을 가르치다

 

 

러시아의 극동 외딴 사할린 섬에 남겨진 한인들은 해방 당시 4만 3천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소련 영역내 거주하는 자로서 소련국적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는 자는 무국적자로 간주한다"는 소련 국적법에 따라 이들은 종전 직후 무국적자로서 거주, 취업, 교육 등에서 차별을 받으며 살게 되었고, 1950년에 이르러서야 소련이나 소련의 우방인 북한의 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한편 소비에트 정권의 본격적인 통치가 실시되고,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현지의 한인들을 위한 한국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학교들은 1964년 사할린 주행정부의 결정으로 폐지되는 운명을 맞게 되고, 사할린 한인들은 조국의 말과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여건조차 박탈당하게 됐다.

 

일본 사람들이 귀환하기 전까지 우리 마을에는 일본 소학교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아이들은 일본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일본말만 해야 했던 시기가 이미 지났고 전혀 모르는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했으므로 우리는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다.

 

러시아 당국은 1946년 경에 모든 한인 아이들이 일본 학교에서 일본 글과 일본 말을 배우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대로 남겨 두면 안된다고 했다. 사할린 여러 곳에 한국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도 여섯살이 되던 1948년 누님을 따라 새로 개교한 한국 소학교 일학년에 입학했다. 학교 설립 초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일본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후 한국학교에 가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차츰 늘어났다. 우리 촌에서 한 노인 부부가 교편을 잡게 되면서 일학년 반에 여러 나이의 학생들이 책상에 나란히 앉아ㅍ 또박또박 한글을 쓰고 읽었다.

 

내가 일학년에서 공부할 때 제일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수업 시간에 일본말을 한 탓으로 죄를 받는 경우이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사인이  적혀있는 종이 쪽지를 10개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일본말이 입에서 튀어 나올 적마다 그 쪽지 하나씩 빼앗기게 되어 있었다. 학교에 다니기 전에 맨 일본어로만 말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날 무렵 그 쪽지는 하나도 남지 않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벌을 면치 못한다. 복도 청소, 교실 구석에 무거운 걸상을 뻗어 있는 손에 들고 있어야 하는 벌, 변소소제, 장딴지에 매맞기, 한 겨울에 교실에서 쫓겨나 밖에서 벌벌 떠는 것 등등. 이러한 엄격한 조치로 인해 일본 말을 점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3~4년 후 우리 마을에 학생수가 많이 늘었다. 반수는 6개였는데 1학년과 2학년은 2반, 3학년과 4학년은 1반씩이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전체 학생수는 64명이었다.

 

교사로는 1학년을 가르치는 김선생님과 2, 3, 4학년을 가르친 박춘호, 정학만 선생님이시였다. 이렇게 3명이 국어, 미술, 창가, 정서, 체조를 가르쳤는데, 자주 한 교실에서 2, 3학년생들이 같이 수업할 때도 많았다.

 

 

1952년 나는 포로나이스크시 제4번 중학교(칠년제) 기숙사에서 5학년을 공부했다. 니또이 촌에는 소학교만 있었기 때문에 포로나이스크 구역 여러 지방에서 모인 학생들이 숙소를 정하여 공부하였다.

 

학교 건물은 아주 낡았고 기숙사 한 방에 10여 명이 살게 되었다. 그 당시 내 나이는 10살이었는데 키도 작았고 체중도 약한 편이었다. 우리 반에는 20살 이상 되는 북조선에서 파견된 노무자의 자녀들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한테 멸시를 당하곤 했다.

 

다행히도 그 이듬해에 행정 구역의 구획이 바껴 나는 다른 니또이 촌에서 온 기숙생들과 같이 마카로브 중학교 기숙사로 옮겨졌다. 거기에서 1955년에 7학년을 졸업하고 와흐루셰보 탄광 제1 중학교 8학년 (러시아어)에 입학했다. 우리 가족이 거처를 그리로 옮겼기 때문이다.

 

사할린 잔류 한인 동포들은 일본은 물론 소련과 대한민국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러시아인과 동화해야 했고 자기의 민족 문화 풍습을 잊어야 했다. 조국도 모르고 다수의 경우 서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고 무권리, 민족 차별을 몸소 겪게 되었다.

 

소련 당국은 한국학교, 한국극장과 예술단을 폐쇄하고 일반 생활에서도 여러가지 난관에 부닥치게 했다. 소련 정부는 한인들을 노동자원으로 억류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소련 정부는 국적 선택을 요구했다. 그러나 많은 한인들은 소련 공민증을 가지면 귀국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여 무국적자로 남았다. 무국적자의 이동이 부자유하고 생활이 몹시 불편했지만 귀국 희망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살아나갔다.

 

 

1958년 내가 소련 중학교 10학년을 졸업할 때 난 무국적자였다. 일제시대 사할린 한인들은 모두 다 일본 공민이었었는데 해방 후 사할린에 억류되어 무국적자가 된 것이다. 그 해 소련 연해주 나호드카에 북한 영사관이 개설되었다. 그때부터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국적을 받으라고 총영사관 리태식 서기관이 사할린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선전했다.

 

그리고 북한의 일류대학에 무시험 입학시켜 주겠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그 바람에 사할린 조선 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북한 국적을 획득해 큰 희망을 품고 유학을 떠났다.

 

조국에 가서 모국어를 계속 공부하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었다. 마음대로 대학을 선택할 수 있고 1년이 지나면 부모 방문을 허락하겠다고 했는데, 그 어느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사할린에 돌아오겠다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국경을 넘어오다가 붙들렸다는 소문이 나돈 뒤 행방불명됐다고 유즈노사할린에 거주하는 한 여인이 자기 동생에 대해서 말했다.

 

나도 역시 1959년에 북한 국적을 획득했다. 모스크바 국립 종합 대학에 입학하려고 하다가 무국적자인 탓으로 문서 접수에 거절당한 바람에 절망에 빠진 나는 북한에 가서 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결정을 내려 리태식 서기관을 찾아갔다.

 

그는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하며 즉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여권을 내주었다. 어리석은 마음으로 북한 입국 신청서를 써서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뽀드고르늬 두메 산골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조선 홀아비 30명을 데리고 나무를 베어서 강물에 띄워 목재를 유송하셨기 때문이다.

 

애타는 마음으로 비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제때 받지 못해 가는 기간을 놓쳤다. 리태식 서기관은 미안하다면서 다음 그룹이 형성되는 대로 꼭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부모와 친척들의 설득으로 출국을 취소하게 되었다.

 

나는 1970년대 후반까지 북조선 공민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유는 북조선 공민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국적에 대한 법'에 의하여 국적 변경이 불가능한 데 있다. 북조선 공민인 탓으로 대륙 대학에 입학 허가를 못 받아 1962년에서야 유즈노사할린스크 국립 사범 대학 물리수학과에 입학했다.

 

그 당시 소련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법규에 의하여 무국적자와 외국 공민의 권한은 제한돼 있었다. 소련 영토에서 그들은 일정한 형식의 거주증을 받게되었다.

 

거주증의 기한은 3개월, 다음 6개월 연기되었다. 거주증을 기한이 끝나기 전에 재등록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또한, 거주증에 지적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단기간 이동하려면 외국인 비자, 등록부(오위르)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다.

 

사할린 한인에게는 천부 인권마저 보장되지 못 했다. 헌법상 소련 모든 민족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지만 법과 실생활은 꼭 일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50년 동안 우리는 천대 속에서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직장에서 한국인이 더 낫게 일해도 표창을 할 때는 러시아 사람들이 우선적이었다. 책임자나 지도자의 직책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소련 국적을 획득한 사람도 인종 차별 대우를 받았다. 18살이 되어 군대에 가게 되면 조선 사람들은 건축 부대로 보내졌고 대학 입학도 제한된 학부나 도시에서 가능했다.

 

한글교육은 1988년에 재개되었다. 1988년 3월에 주교육부 주최로 한국어 교육자 연수(처음 20명)를 시작으로, 9월 1일부터 9개 구역 13학교에서 선택 과목으로 채택하여 총 438명이 배우게 되었다.

 

1988년 9월 유즈노사할린스크 사범대학 역사부에 역사-한국어과가 설치된 이후 1991년에 동양학부 한국어-영어과로 독립, 1994년 6월 17일에 8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크 제9학교는 옛 한국학교의 자리에 있는 러시아 학교였으나, 1992년 9월 1일 동양어문학교가 되었다.

 

[ 글 = 박승의 전 사할린 국립대 교수]

박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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