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 1795년의 현륭원 참배, 과천길을 시흥길로 바꾸다

2025.07.01 06:00:00 13면

 

'정조실록' 1794년 4월 2일에 “금천(衿川)에 행궁(行宮)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금천은 임금이 머무는 행궁이 있는 고을이 되었기 때문에 다음 해 2월 1일에 지방관을 종6품의 현감에서 종5품의 현령으로 올려주었고, 고을의 이름도 옛 이름 중 하나였던 ‘이제부터 흥한다’는 뜻의 시흥(始興)으로 바꾸었다. 시흥행궁의 완성은 화성행궁-현륭원 가는 길을 과천길에서 시흥길로 바꾸겠다는 의지의 결과다.

 

그런데 과천길에 비해 시흥길은 돌아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멀다. 경기도의 남서부, 충청남도, 전라도, 경상도 서남부의 사람들이 괜히 시흥길이 아니라 과천길로 서울을 오간 것이 아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서울로부터 화성행궁과 현륭원까지 과천길이 각각 70리와 90리인데 반해 시흥길은 80리와 100리로 10리가 더 멀게 기록했다. 그럼에도 시흥길로 바꾼 이유를 경기감사 서영보는 이렇게 말했다.

 

“현륭원에 거둥할 때의 길가에 있는 지방 가운데 과천 지역은 고갯길이 험준하고 다리도 많기 때문에 매번 거둥할 때를 당하면 황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중략)… 여러 차례 편리한 방도를 생각해보라는 명이 있었기에 전후의 관찰사들이 모두 금천으로 오는 길이 편하다는 내용을 이미 올렸습니다. 신이 이번에 살펴본 바로는 비단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현저한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지대가 평탄하고 길이 또한 평평하고 넓으니 이 길로 정하는 것은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략)"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현륭원 참배를 겸하여 수원행궁에서 개최할 것을 결심하고는 경기감사 서영보에게 시흥길을 개척하라고 명한 결과의 기록이다. 환갑을 맞이한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에는 과천길의 남태령(183m)이 너무 험하고 높다고 보았다. 하지만 아직 그 사실을 숨겼는데, 12월 10일에서야 신하들에게 밝혔다. 10만 냥이라는 큰 행사 비용과 대규모 행사에 대해 있을지 모르는 정치적 반대파의 눈도 그렇고,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도 부담이 컸던 것 같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김상로(1702~1766)의 형 김약로(1694~1753)의 무덤이 과천길의 찬우물술막(冷泉店)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이를 보기 싫어해 과천길을 시흥길로 바꾸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조가 원행 때마다 김약로의 무덤 보기를 아주 싫어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과천길을 시흥길로 바꾸게 한 근본 이유는 고령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가기에는 남태령이 너무 높고 험해 어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김약로의 무덤 관련 이야기는 후대의 사람들이 ▲과천길이 시흥길보다 짧아 서울-수원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과천길을 이용하고 있었고, ▲그래서 원행길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과천길을 채택했으며, ▲5년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이어오던 과천길을 갑자기 시흥길로 바꾸었고, ▲과천길 곁에 정조가 아주 싫어했던 인물인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무덤이 있었다는 것, 이런 사실들을 조화롭게 엮어 만든 설화다.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겹친 여러 사실을 창조적으로 묶어 재밌는 이야기로 재탄생 시킨 우리의 소중한 역사 자산이다.

 

이기봉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974-14번지 3층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