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이제 나이가 든 모양이다. 한평생 잘 살다 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우니 말이다. 과거에는 명성이 높거나 돈을 많이 벌어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더러 선망했다. 요즘은 시류에 물들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이 더 멋져 보인다.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포드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위대한 개츠비’, ‘아웃 오브 아프리카’, ‘흐르는 강물처럼’ 등, 숱한 히트작으로 세계 영화 팬들을 사로잡아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스타로서의 화려함보다 가치 있고 보람된 자신 만의 삶을 추구했다.
그런 그가 지난 16일 미국 유타주 선댄스 자택에서 영면했다. 89세로 마감한 그의 인생은 ‘칼로스 카가토스(καλὸς κἀγαθός)’ 그 자체였다. 즉,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숭고한 삶이었다. 그는 배우로서 신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감독으로서 관대하고 진취적이며 낭만적인 영화를 제작했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그 정체성을 바꾸고,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며, 유토피아를 찾고자 열망했다.
1936년 8월 18일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태어난 레드포드는 청소년기 학교를 결석하기도, 술을 마시기도 해 퇴학을 당한 적도 있다. 전후 미국 쁘띠부르주아 사회에 불편함을 느낀 그는 웨스트코스트 재즈를 듣고 그림을 그리며 방랑을 즐겼다. 그런 그가 정치적 양심을 키우게 된 것은 스무 살 때 파리에 머물며 미술 공부를 하면서였다. “수에즈 사건 다음 날이었어요. 국제 정세에 대해 성찰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라고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훗날 밝혔다.
화가로서 한계를 느낀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연극 디자이너?’ 수줍음이 많고 과시적인 삶을 싫어한 그는 배우가 될 생각을 꿈속에서 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연기의 길로 이끈 건 그의 애인 롤라였다.
배우 인생 초기 그는 젊은이의 눈부신 모습을 투영했다. 하지만 점차 일관된 도덕적 인물로, 자유와 창조적 독립을 수호하는 예술가로, 그리고 시민으로 변모해 갔다. 1963년 그는 선댄스의 작은 땅을 매입해 태양열 주택을 짓고 말을 키웠다. 확고한 민주주의자이자 환경운동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옹호자인 그는 1980년 젊은 영화인을 육성하기 위해 선댄스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창작 센터로 성장해 선댄스 영화제로 우뚝 섰다. 이렇게 자기만의 길을 열어 나가며 레드포드는 할리우드 스타와 거리를 두었다.
친환경적 예술 공동체 구축을 위한 그의 노력은 선댄스를 아름답고 평온하고 순수함이 머무는 유토피아로 만들었다. 1989년, 그는 이곳에 있는 자신의 목장에 소련과 미국의 지도자들을 초대해 지구 온난화에 관한 첫 삽을 떴다. 그때 그는 “정치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대중의 압력뿐 이예요. 그러나 대중은 문제 자체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라고 설명했다. ‘흐르는 강물처럼’과 ‘말 속삭이는 자’는 대중을 깨우치기 위해 그가 의도적으로 만든 환경 영화다.
한 번뿐인 인생을 의롭고 정의로운 쪽에 걸었던 레드포드, 그는 정녕 이 시대 보기 드문 큰 바위 얼굴이었다.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의 말처럼 그는 ‘신화 그 이상의 존재’이자 ‘헌신과 투쟁’의 화신이었다. ‘칼로스 카가토스!’ 당신이 있어 위안과 기쁨을 얻었고 행복했습니다. 편히 잠 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