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歲月如流水)’고 하더니, 소설가 김용성 선생을 저 먼 나라로 떠나 보낸 지 벌써 14년이 지났다. 중앙대학교 병원에 누워 급작스럽게 필자를 호출하시기에 그동 안 좋지 않았던 허리 수술 때문이겠거니 했는데, 이미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병상의 선생은 필자의 손을 붙잡고 세 가지 부탁을 했다. 하나는 젊은 날의 역작 ‘한국현대문 학사탐방’을 재출간하는 일, 다른 하나는 그동안 쓴 에세이를 책으로 묶는 일, 그리고 마지막 으로 다른 비평가나 연구자들이 쓴 김용성론을 책으로 출간하는 일이었다. 다른 논의가 필요 없었다. 즉시 서두르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급하게 서둘렀다. 그래도 6개월이 족히 걸렸다. 마지막 교정을 마칠 즈음에 연락을 받았다. 떠나셨다는 비보였다. 혼자 앉아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오래 울었다. 누구보다도 필자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준 선배였다. 내게 남긴 유언이 있었다. 세 권의 책을 진행하여 ‘한국현대문학사탐방’ 복원판과 에세이집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및 작가연구 총서 ‘김용성론’을 간행하고, 그 이듬해 문학의집서울에서 추모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행사를 마치면서 다시 또 서럽게 울었다. 선생과 함께 할 때는 그 세월의 소중함을 모르지 않았던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갓 군문을 나와 대학에 복학한 1980년 봄이었다. 그때 우리 의 은사 황순원 선생을 모시고 ‘작단’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소설가 동인 회합에 따라갔다가, 전상국·김원일·유재용 등 당대의 작가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복을 누렸다. 그 모임의 일원이었던 김용성 선생은 막 불혹의 고개를 넘는 청춘이요 동안인 열혈 전업 작가였다. 선생은 이미 ‘리빠똥’ 시리즈로 이름이 높았던 장편 ‘리빠똥 장군’과 ‘리빠똥 사장’을 출간하고, ‘내일 또 내일’과 ‘홰나무 소리’ 등 다수의 소설을 내놓음으로써 문단에 성명(盛名)이 쟁쟁하던 시기였다. 1982년 선생은 늦깎이 학생으로 대학원에 입학했고 필자는 선생과 같은 교실에 있었다.
선생은 박사를 마치고 곧바로 인하대 교수로 갔다. 하지만 언제나 책상 앞의 일만 바라보는 고리타분한 글쟁이가 아니었다. 당시의 우리 후배들은 선생과 함께 한 자리에서 늘 밥과 술을 얻어먹었다. 그래서 필자는 나중에 세상 위로 날 수 있는 날개가 생기면, 선생을 모신 곳 어디에서나 밥값 술값을 내겠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은퇴 후에 이 말씀을 전해 들은 선생은 “김 교수, 약속을 지키시오”라고 다짐을 받았고 필자는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모두 꿈에 서도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들이다.
선생의 노년이 조금 한가해지고 2009년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 문을 열었을 때, 선생을 초대 촌장으로 모셨다. 작가로서의 명성과 순후한 인품은 황순원 선생의 행적을 닮아, 촌장으로는 그보다 더 적격의 문인이 없었다.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소중한 것은 그가 훌륭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와 더불어 보낸 시간의 소중함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 다. 이 마당에 사뭇 걱정인 바는, 과연 필자가 후배 중 누군가에게 선생과 같이 선한 영향력 을 남길 수 있겠는가 하는 지난(至難)한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