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유산은 오래된 미래다. 선조의 삶의 양식을 고스란히 익혀 현재의 지표로 삼고, 후대에게 새로운 해석과 함께 전달하는 기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용인은 문화유산의 보고다. 시대·주제별로 다양한 타임캡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인 문화유산을 시대별로 세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① 선사시대
② 삼국시대
<계속>
◇보정동 고분군
신라시대에 조성된 대규모 고분군이다. 기흥구 보정동의 삼막곡 저수지 근처 소실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 능선의 끝, 남사읍에 넓게 펼쳐져 있다.
지난 2002년 벌목한 경사지에서 다수의 봉토분(封土墳)이 발견됐으며, 정밀조사를 거쳐 80여 기가 넘는 고분이 모여 있는 것이 확인됐다. 그 가운데 2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6세기 후반에 축조된 앞트기식(무덤의 측면에 입구를 만들어 여러 명을 추가로 매장할 수 있도록 만든 무덤) 돌덧널무덤(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돌로 직사각형의 벽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한 구덩식 무덤)임이 확인됐으며, 신라 지배층의 무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수지~신갈사이 6차선 도로를 개설하면서 노선이 보정동 고분군 동쪽지역을 관통하게 돼 2004~2006년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했는데 확인된 유구는 구석기 문화층을 비롯, 210기로 백제시대 움집, 원삼국시대 독무덤과 토실, 통일신라시대 돌방무덤,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의 돌덧널무덤, 중·근세에 조성된 회곽묘와 널무덤 등 다양한 시기에 걸친 생활·분묘 유구가 조사됐다.
이 가운데 신라, 혹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앞트기식 돌방무덤(지하에 묘광을 파고 돌을 이용하여 무덤방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한 굴식 무덤)과 돌덧널무덤 10여 기가 확인됐다.
돌방무덤의 경우 장방형 평면으로 석실을 만든 후 뚜껑돌을 얹은 형태로 조성됐다.
유물은 6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굽다리 긴목항아리·굽다리접시·굽다리바리·등 토기류와 청동 허리띠장식 등 금속류가 출토됐다.
조사결과 용인 보정동 고분군은 6~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이후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 시기 신라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높은 학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충청·경기 지역에서 발견된 신라 고분군 가운데 대규모 고분군이라는 점에서 보정동 일대가 북진하던 신라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개착식 터널공사 후 이 유적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상부에 원래의 지형과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을 원상태로 추정 복원했고, 일부 고분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할미산성
할미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기흥구 동백동과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및 마성리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신라시대 산성이며, 노고성(할미성, 마고성)으로도 불린다. 할미산성은 성 내부가 길이 180m의 벽으로 남북으로 양분돼 있는데, 북쪽의 내성과 남쪽의 외성으로 구분된다. 북쪽의 내성은 정상부를 포함한 높은 지대에 축조되었고, 남쪽의 외성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조성되었는데 사모봉형(紗帽峯形)으로 보인다.
용인 할미산성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다각형 건물지·장방형 건물지·수혈주거지·매납유구·집수시설·방형적석유구·구상석렬유구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이들 유구 가운데 방형적석유구는 유구 중앙 빈 공간의 토광부에서부터 외곽의 4방향으로 방형을 형성하도록 적석하고, 최외곽부는 호상으로 마감한 형태의 유구이며, 내부에서 수지·산수문 등의 문양이 음각된 (추정)기대(器臺, 그릇받침)와 같은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제사와 관련된 시설물로 판단된다.
이런 유구는 지금까지 고대 산성에서의 출토 사례가 없어 매우 특징적이다. 또한 남쪽 경사면에서는 팔각형 건물지가 조사된 바 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고배와 토기로 만든 완(사발형태의 접시) 등으로 볼 때 할미산성은 전쟁이 없던 평상시에는 시조신과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정상부에서는 매납(埋納, 특정한 목적으로 청동기나 석기 등 유물을 묻는 것) 유구가 발견됐으며, 평지에서 적심석(돌을 쌓을 때 안쪽에 두어 무게를 받치도록 하는 돌)이 나왔고 작은 개울(수구지)과 토광 등이 조사됐다.
사람이 살았던 주거지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주거지는 대부분 해발 약 297m에 집중적으로 조성돼 있다. 주거지 대부분에는 취사시설과 난방시설이 설치돼 있는데 돌을 이용하여 부뚜막과 구들을 만들었다.
할미산성에서는 지금까지 철제가위, 화살촉, 갑옷의 부속구 등 철제류 일부와 대부장경호, 고배(굽 높은 잔) 등 신라계 토기류 등이 출토됐다. 출토된 유물을 통해 볼 때 할미산성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시기인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에 축조돼 한정적으로 사용된 성으로,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성곽으로 여겨진다.
◇석성산성
통일신라시대~조선시대 용인 방어의 거점이다.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산78-1 산정상에 있다. 처인구와 기흥구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 약 471m에 이른다.
대체로 보개산(寶蓋山)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왔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 '높고 험하다'라고 특기될 정도로 가파른 산세를 가지고 있다. 석성산성은 역시 각종 사서에 보개산성(寶蓋山城)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한다. 해당 산의 400~460m 부근을 이용해 자리잡고 있으며, 둘레 약 2075m에 이른다.
성벽은 산 정상부의 능선 서쪽면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남문지에서 동쪽으로 회절, 등고선과 평행한 방향으로 연결된다. 동문지에서 북서쪽으로 굴절된 성벽은 경사지를 따르다가 암반 절벽의 급경사지를 관통해 정상부로 이어진다.
초기 고대에는 정상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성곽은 중세를 거치면서 점차 그 영역이 확장됐을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주로 나타나는 할석으로 축조하고 안쪽으로 석재를 채운 방식이 성벽 축조에 활용되었으나, 정상부 성벽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가 확인됐고, 정상부를 향할수록 더 오랜 유물들이 수습되며 그 축조 방식이 '고려시대의 것과 다소 상이하다'라고 소개된다.
용인 석성산성은 용인의 진산인 석성산에 축조한 산성으로 산의 정상능선을 포함하는 서성벽 중심 테뫼식 산성과 동쪽 및 남쪽으로 확장 조성한 포곡식 산성이 복합돼 있다.
전자는 일정한 두께로 치석한 할석을 정연하게 바른층쌓기했고, 선문기와와 승석문 토기 등 이른 시기의 유물이 확인돼 삼국시대 말~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확장한 영역으로 자연석이나 최소한으로 치석한 대형 할석으로 쌓았으며, 복합문과 청해파문 등의 유물이 확인된다.
성의 전체 둘레는 2075.4m이다. 문지, 추정 수구지, 성내 평탄지, 봉수 등 각종 시설의 존재는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석성산성은 남한산성과 오산 독산성 사이에 위치해 한강 방어선에 있어 중요한 시설이고, 한성에서 경상도로 통하는 직로상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다.
사방으로 트인 시야는 어느 방향으로도 관제가 유리하므로 관방시설의 입지로서 매우 우수해 오랜 기간동안 사용됐다.
이상일 시장은 "할미산성과 석성산성은 용인 자체의 상징성을 지니는 존재"라며 "용인의 가치를 보이는 시대 그 자체"라고 말했다.
[ 경기신문 = 최정용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