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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왕의 잠저, 운현궁

 

 

 

임진왜란 이후 270여 년 간 방치되었던 경복궁이 다시 우리의 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고종시기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인플레이션 유발과 같은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덕분에 지금 우리는 경복궁이라는 문화유산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고종과 흥선 대원군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운현궁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보통 궁궐은 왕이 살면서 정치를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운현궁은 ‘궁’으로 불리고 있지만 궁궐은 아니다. 그렇다면 운현궁은 왜 ‘궁’으로 불리는 것일까? 이는 고종이 26대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왕의 잠저, 즉 왕이 살았던 집이라는 이유로 ‘궁’의 명칭을 받게 된 것이다.

운현궁은 흥선 대원군의 집으로 그의 아들 고종이 태어나 12세까지 자란 곳이다. ‘운현’은 조선시대 기상관측소인 서운관 앞 고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고개 너머에 흥선 대원군의 집이 있었다. 운현궁은 수직사,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 등의 중심건물과 유물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운현궁으로 들어서자마자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수직사이다. 수직사는 지금의 경호실과 같은 곳이다. 즉 수직사는 경호원들이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위해 거처하던 곳이다. 운현궁으로 들어가 흥선 대원군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직사를 거쳐야 했으며, 수직사의 허락이 있어야만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운현궁의 규모는 당연히 커졌다. 규모가 늘어남과 동시에 흥선 대원군의 권력 또한 막강해졌으며, 흥선 대원군과 운현궁의 경호를 위한 경비병이 궁궐에서 파견되었고, 관리인들도 많아졌다.

수직사를 지나 노안당으로 들어가 보자. 노안당은 흥선 대원군이 사용하던 사랑채로 아들이 임금이 되어 좋은 집에서 노년을 보내게 되어 흡족하고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노안당 편액은 흥선 대원군의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노안당의 오른쪽으로 튀어나온 영화루에서 흥선 대원군은 손님을 맞이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어린 아들 고종이 왕이 되고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출세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안당 문턱을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또한 노안당은 서원철폐, 복식개혁 등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노안당은 1994년 보수공사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는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문무백관의 으뜸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흥선 대원군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노안당을 지나 노락당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건물로 운현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이 곳은 흥선 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가 사용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되어 이곳에 머물며 왕비수업을 받았고 고종의 가례식도 이 곳에서 열렸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 노락당에서는 전통 혼례식이 진행되기도 한다.

고종이 운현궁을 방문하면 이곳 노락당에서 주로 머물렀다. 그래서 조금 더 특별하게 꾸몄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희미하게 남았지만 노락당의 대들보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노락당을 지나 이로당으로 향한다. 이로당은 두 노인을 위한 집이라는 의미로 운현궁의 안채이다. 안채답게 바깥으로는 출입문이 없고 사방이 막혀 있으며, 노락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ㅁ’자형 구조이다. 원래 운현궁의 안채는 이로당이 아닌 노락당이었다. 하지만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식이 치러진 뒤 새롭게 지은 것이다.

흥선 대원군은 며느리 명성황후에게 권력을 빼앗긴 뒤,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3년 만에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사랑채인 노안당에서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게 된다.

운현궁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흥선 대원군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다. 흥선 대원군과 그의 정책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가 쇄국정책을 강화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운현궁을 거닐며 사색에 잠겨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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