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권
귀뚜라미는 나에게 가을밤을 읽어주는데
나는 귀뚜라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언제 한번 귀뚜라미 초대하여
발 뻗고 눕게 하고
귀뚜라미를 찬미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오늘 밤에는
귀뚜라미로 변신하여
가을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동네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봐야겠다
- 박형권 시집 ‘우두커니’ / 실천문학사·2009년
달빛 아래 우두커니 서서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우두커니」) 뭘 어루만지고 있’는 한 사람. 달빛만이 눈 맞추는 잠 못 드는 밤, 귀뚜라미는 또르륵 또르륵 깊어가는 가을을 읽어주고…. 벌레 울음소리는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시 「저녁」에서도 시인은 귀뚜라미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몸 비비며 덤벼드는 너를 피할 길 없’어 ‘깨알만 한 내 그리움이 깨알을 만나러 간다’는 가을이 우물처럼 깊어간다. 나도 한번 지그시 눈 감고 촉수를 세워 가을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본다. /김은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