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7 (금)

  • 맑음동두천 10.6℃
  • 맑음강릉 14.7℃
  • 맑음서울 14.0℃
  • 맑음대전 13.6℃
  • 맑음대구 14.2℃
  • 맑음울산 11.6℃
  • 맑음광주 15.1℃
  • 맑음부산 17.6℃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19.1℃
  • 맑음강화 11.3℃
  • 맑음보은 10.9℃
  • 맑음금산 12.4℃
  • 맑음강진군 14.5℃
  • 맑음경주시 10.4℃
  • 맑음거제 16.4℃
기상청 제공

[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31. 정조(正祖)대왕 남한산성 기해주필

 

정조대왕이 기해(己亥, 1779)년에 남한산성에 주필(駐蹕)했다. 1779년은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孝宗)이 승하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정조가 여주에 있는 효종 영릉(寧陵)을 참배하러 가고 오는 길에 남한산성에 들렀다.
 


남한산성 동문 밖 계곡에 ‘己亥駐蹕’이라 새긴 큰 바위가 있다. 정조4(1780)년 5월 26일 임금이 말하기를 "동문 밖에는 암석이 많다. 수어사 김종수(金鍾秀)는 ‘기해주필(己亥駐蹕)’ 넉 자를 써서 바위 표면의 비를 가릴 수 있는 곳에 새기고, 그 아래에 ‘수어사 신 봉교서(守禦使臣奉敎書)’라고 쓰라. 그리고 1건을 간인(刊印)하여 올리라"고 했다. 신하들은 임금의 친필을 요청했지만, 정조는 "나는 본래 글씨를 잘 쓰지 못하니 다른 사람에게 쓰고 새기게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하고 김종수에게 쓰도록 한 것이다.
 
1779년 8월 3일 정조임금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면서 백성과 군사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하였다. "행행(行幸)이라는 것은 백성이 임금의 행림(行臨)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백성 을 편리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아뢰라"고 하였다.
 

 


8월 4일 임금이 경안교에 이르자 백성들이 행차를 구경하려고 먼 지방 사람들까지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영릉 참배를 마치고 8월 7일에 남한산성 지수당에 이르러 백성들의 고생되는 바를 물었고, 연병관(연무관)에 이르러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러 나온 백성들을 만나봤다.

 

8일에는 연병관에서 과거시험을 친히 행하였는데, 문과 응시자는 800여 명에 이르렀고, 무과 응시자는 숫자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날 과거의 주제는 ‘덕에 달려 있지 험준한 데 달려 있지 않다.(在德不在險)’로 했는데, 행궁 뒤의 ‘재덕당(在德堂)’ 현판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9일에는 장교·서리로부터 아래로 군졸·평민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겪고 있는 20년 묵은 빚돈을 탕감해 주고, 채무문서를 연병관 마당에 모아서 불살라 버리게 하니,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임금의 은덕이 하늘처럼 끝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신하들이 관청운영 경비를 걱정하자 정조는 "할아버지(영조)가 말씀하시길 백성은 너의 피부와 같다 하셨으니, 지금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은 나의 피부가 아픈 것과 같다. 관청 운영 경비는 다른 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8월 10일까지 남한산성에 머무르면서 은덕을 베풀었고, 그 일을 기념하여 바위에 己亥駐蹕’ 네 글자를 새긴 것이다.
 


정조임금의 행차 코스는 한양에서 여주까지 매우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또한 가는 곳마다 무엇을 탔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기록돼 있다. 처음엔 융복(戎服=군복)을 입고 가마를 탔고 인정문 밖에서는 말로 갈아타고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지나 관왕묘에서는 가마를 타고 들어가 두 번 절하고 나와서는 다시 가마를 타고 대문 밖에서는 말을 탔다.

 

용주(龍舟)를 타고 광나루를 건너면서 대포를 쏘았고,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는 말을 하였다. 율목정에 와서는 금으로 장식한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영접소에 도착하니 수어사 서명응이 갑옷에 투구를 쓰고 꿇어 앉아 맞이했고, 남문에 와서는 편액을 누가 썼냐고 묻는 등 가는 곳곳마다 세세하게 유래를 질문했는데 연덕우라는 하급장교가 해박하게 답해 크게 칭찬을 받았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