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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역병(疫病)은 늘 극심한 혼돈 속에서 온다

㊻ 베네데타 - 폴 버호벤

 

1613년에 이탈리아 페샤(pescia)의 한 수녀원에서 벌어진 섹스 스캔들이 500년 만에 영화 ‘베네데타’로 부활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거장인 폴 버호벤이 만들었다. 폴 버호벤은 83세로, 우리에겐 ‘원초적 본능’이나 ‘로보캅’, ‘쇼걸’, ‘스타쉽 트루퍼스’란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전작인 ‘엘르’란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는 할리우드보다 파리를 근거지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솔직히 그는 언제부턴가 퇴물 감독으로 취급받아 왔다. 그러나 폴 버호벤은 폴 버호벤이다. 특히 이번 신작 ‘베네데타’는 노령인 그의 거의 마지막 역작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오랜 숙원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베네데타’는 실화다. 1613년에 벌어진 한 종교재판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현대의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주디스 브라운 교수에 의해 ‘수녀원 스캔들 –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By Judith C. Brown. 214 pp.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이란 논문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폴 버호벤은 그 역사서를 매우 도발적인 드라마로 뒤바꾸어 놨다. 영화는 매우 외설적이고 야하다. 폴 버호벤 영화가 다분히 그래 왔듯이 수위가 상당히 높다. 나오는 여성들, 수녀들은 자신들의 나신(裸身)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그도 그럴 것이 ‘베네데타’ 실화의 상당 부분은 섹스 스캔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적나라함(nudity)은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베네데타’는 17세기 초반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무엇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점이야 말로 이 영화를 통해 폴 버호벤이 보여주려는 진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베네데타 까를리니는 벨라노 출신이다. 그녀는 어릴 때, 그러니까 약 8세 때부터 수녀가 됐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가문의 영광 같이 여겨지던 때였다. 베네데타의 집안은 상당한 금액의 지참금을 지불해 가면서까지 그녀를 수녀원에 들여보낸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 증상이 나타난 것은 23살이 되던 때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환상을 신성화하기 시작한다.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에게 빙의가 일어나는 것도 이때쯤부터인데, 그녀는 성인 남자(예수)의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등 신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왔음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영화는 기록과 역사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각색을 통해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처럼 손과 발에서 피를 내는 베네데타의 모습을 그려 낸다. 그녀는 당시의 예수가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는 지적을 받자 이마에서 피를 쏟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성령이 역사(役事)하셨음을 증명함으로써 30세의 이른 나이에 페샤 수녀원의 원장이 된다.

 

이때부터 그녀는 비교적 무소불위의 인간이 돼 가는데 그녀는 바로 예수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수녀원 주변에서 살아가는 민생들도 그런 그녀를 신격화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고단한 인생살이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들의 죄를 대속(代贖)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세상에는 막 페스트가 창궐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진다.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열망한다. 베네데타는 사람들의 그런 심리에 딱 부합되는 인물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때부터 베네데타는 수녀 견습생인 바톨로메아(다프네 파타키아)와의 성관계에 탐닉하기 시작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의 베네데타는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성에 눈을 뜬 바톨로메아로부터 섹스를 알게 된다. 바톨로메아는 베네데타를 위해 마리아 성상을 이용해 자위 기구를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베네데타의 이런 행각은 결국 대교구에 고발 조치된다. 영화에서는 베네데타에게 원장 자리를 뺏긴 전 원장(샬롯 램플링)이 고발하는 것으로 나온다. 베네데타와 바톨로메아는 곧 종교재판에 넘겨진다. 실화에서든 영화에서든 베네데타는 대교구 감찰 주교에 의해 혹독한 심문을 받는다. 중세에서의 심문은 곧 고문을 의미한다. 감찰 주교는 이 모든 것이 오히려 신성모독이자 베네데타의 음란하고, 권력을 탐하는 성정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예수처럼 양 손에서 피가 나는 것도 그녀의 자해(自害) 때문일 수 있음을 밝혀내려 한다. 베네데타는 바톨로메아의 섹스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속에 들어 온 청년 예수가 시켜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이런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바톨로메아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는데, 그녀는 베네데타의 자위 기구를 증거로 제출하기도 한다. 영화의 결말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1610년대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막 일어나기 직전의 시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도, 종교가 이성적이 돼가던 시기였다. 수녀원이나 수도원에서 빈번하게 자행되던 매관매직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었고, 신부나 수녀의 성적 일탈 행위는 다반사처럼 벌어지던 때였다. 종교가 전부였던 중세에 종교가 가장 타락했었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개혁의 형태로 진행되기 직전의 상황이다. 그와 같은 시대적 배경이야 말로 베네데타에 대한 종교재판이 엄정한 형태로 진행됐던 이유이고 그녀의 종교적 범죄 행위를 증거나 증거물, 합리적(?) 증언으로 입증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맹신과 불신이 교체되던 시기였고 종교적 환상과 과학적 이성이 교차되던 시기였다. 개혁론자들은 아직 어설펐고, 민중들은 아직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못했다. 수도원 주민들은 여전히 베네데타에게 성령이 임해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페스트로 사람들은 속절없이 죽어 가는 중이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폴 버호벤의 생각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시대가 됐든 가치와 이념이 흔들릴 때, 그리고 그 혼란이 극에 달할 때 물리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형태이든 역병이 창궐한다는 것이다. 베네데타와 페스트의 대구(對句)는 기이하게도 지금의 정치적 상황과 코로나19로 겹쳐 보인다. 우리는 지금 어떤 종교적(정신적) 아노미에 빠져있는가. 세상은 어떤 정치적 혼란에서 허우적대고 있는가. 바로 그 점이야 말로 폴 버호벤이 보여주려는 카오스(chaos)의 정치학이다. 혼란에도 법칙이 있다. 나중이 돼서야, 그 법칙이 보인다는 것이다. 혼돈의 와중에는 혼돈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혼돈스럽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온갖 거짓의 환상에 빠지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늦게 온다. 그게 늘 문제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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