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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다

도시 개발에 추억 사라져
새것 낡은것 상생 이질감 극복

 

법원사거리 쯤이었다. 바쁘게 걷고 있던 나를 웬 노인이 불러 세웠다.

“이보우, 말 좀 물읍시다. 원천저수지로 가자면 어찌 해야하우?” 남루한 행색의 노인은 붙잡아 세워 미안하다는 얼굴로 길을 물어왔다.

“원천저수지요?”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그곳이 원천유원지임을 깨달았다. 원천유원지라는 지명이 귀에 익었던 탓에 원천저수지란 말이 생경하게 들린 것이다.

머릿속으로 저수지와 유원지의 시간적, 공감각적 차이를 짚어보며 나는 소상하게 원천유원지로 가는 길을 설명했다. 노인은 내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길게 뻗은 도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막막한 눈빛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옛날에 한번 와봤는데 도무지 길이 낯설어서…” 노인은 무렴한 낯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돌아서 멀어져가는 노인의 괴춤에서 점심도시락인 듯한 까만 비닐봉지가 햇살을 까부르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도 돌아섰다.

내처 길을 걸으며 나는 노인이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까 적잖이 걱정됐다. 노인이 찾는 저수지는 이제 유원지가 돼 있다. 예전의 기억을 되짚어 나들이를 나선 노인은 방죽 물이 미풍에 잔잔한 파문을 그리고 물새가 유유히 날던 그림같은 물가를 추억할 것이다. 그렇기에 괴춤에 봉지도시락을 차고 소풍을 나선게 아니겠나.

예전에 그곳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수려선 협궤열차(일제때 만들어져 1972년에 사라진 수원~여주간 열차)를 타고 덜컹덜컹 흔들리거나 시외버스로 먼지 자욱한 비포장길을 달려 푸른 방죽에 닿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노인도 젊은 날 그런 상춘객으로 저수지를 찾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조용한 쉼터는 사라졌다. 그것은 아련한 회상이나 색바랜 사진 같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제 그곳은 놀이기구들이 굉음을 울리며 어지럽게 돌아가고 귀가 아프게 악악거리는 마이크소리가 새들을 쫓아버리는 곳이다. 차들 때문에 한가로이 걷기조차 어려운 그곳에서 노인은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할 것이다. 노인은 원천유원지에서 원천저수지를 찾아 헤매다 길을 잃을 것이다.

지금 이 땅의 많은 도시들은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며 삶터 구석구석을 빠르게 바꿔나가고 있다. 특히 수도권은 수많은 신도시와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 주거환경개선 등의 명목으로 도시 전체를 거대한 공사장으로 만들고 있다. 해마다 신축되는 주택의 80%가 아파트일 정도로 도시는 아파트숲으로 변해간다. ‘아파트공화국’이란 말이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모두가 공감할 정도로 가열찬 개발의 행군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수요에 따른 공급의 확대이건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정책적 선택이건 간에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렇게 도시가 상자같은 아파트로 채워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추억과 삶의 체취가 배인 풍경들도 지워지고 있다. 개발에 삶터를 뺐긴 가난한 사람들은 막막하게 내몰리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던 정서조차 뿌리째 뽑혀버린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는 것은 변화의 법칙이자 시대적 추세다. 그러나 새것이 항상 낡은 것보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요는 새것이 낡은 것을 대체해 나가는 방법의 문제일 것이다.

헤겔변증법의 핵심 열쇳말에 지양(止揚, Aufheben)이란 것이 있다. 이 말은 ‘부정하다’와 ‘보존하다’라는 긍정, 부정의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새 것과 낡은 것의 대립 속에서 양자는 일방적으로 한쪽을 부정하고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높은 생성을 위해 불가결한 결합을 꾀한다는 것이다.

이제 상자들의 도시로 변해가는 개발의 행군 속에서 정체성의 이질감을 일상화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다시 새로운 우리들로 지양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원천저수지를 찾아 헤매다 길을 잃은 노인처럼 모두가 삭막한 도시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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