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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선불금

이태호<객원 논설위원>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또예프스끼는 1867년 봄 극도의 빈궁 상태에서 뻬쩨르부르그를 떠나면서 출판사로부터 선불금을 받고 여행 중 장편 소설. ‘백치’를 집필했다. 그는 백치인 미쉬킨 공작을 통해 아름다운 인간을 형상화했다. 선불금, 착수금, 또는 계약금을 미리 받고 집필에 들어가는 문인과 예술인들은 그만큼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증좌다. 선불금은 일종의 독점계약의 징표다. 이 돈을 받은 사람은 더 큰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예술활동에 임한다.

이 선불금이 비극의 올가미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4일과 5일 서울과 대전의 주점 여종업원들이 선불금을 갚지 못해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방, 유흥업소, 집창촌에서 ‘마이킹’이란 이름으로 통용되는 선불금은 다방의 경우 100만~200만원, 성매매를 겸한 유흥업소의 경우 1000만~2000만원이 지급된다. 선불금을 받은 여성들은 그 돈으로 옷, 화장품, 약 등을 사서 치장하거나 복용하며 근무하다가 빚을 지면 감시 속에 합숙을 강요당한다. 그러다가 불이나서 떼죽음을 당한 사례도 있다.

지난 5월 부산지법 제3민사부는 대부업자 김모(30)씨가 술집 업주의 소개로 돈을 빌려준 성매매 여성인 A(32)씨 등 4명을 상대로 제기한 대여금 반환 항소심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윤락행위를 하도록 권유, 알선하거나 강요하는 것, 또는 이에 협력하는 행위는 사회질서에 위반되므로 이와 관련된 채권은 계약의 형식에 관계없이 무효하다”고 원고 패소판결을 했다. 대법원도 연약한 직업여성들을 선불금에서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판례를 정립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흥업소 주인, 사채업자, 그리고 그들의 부탁을 받은 조폭들은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풍토에서 법적으로 변제의 의무가 없는 선불금을 고리로 아가씨들에게 성(性)을 파는 사실상의 인신매매를 강요하고 있다. 사교계의 신데렐라들이 외제차를 굴리며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관재계의 힘 있는 자들과 놀아나며 쌕쌕거리는 동안 선불금에 묶인 이 땅의 불행한 여성들은 노예처럼 혹사당하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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