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석의 작가탐방<45>-이정지의 예술세계
장준석의 작가탐방<45>-이정지의 예술세계
  • 경기신문
  • 승인 2008.04.0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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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신문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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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지가 추구해온 작업세계가 한국성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의도적이거나 계획적이지 않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흙을 빚는 도공의 손길에 한국의 숨결과 혼이 자연스레 담긴 것처럼 물감의 흔적 속에 우리만의 투박한 감성이 담겨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의 예술세계는 한국인으로서의 타고난 감성과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 작가 이정지
물감의 투박함으로 세상과 소통하다

‘무기교적이면서도 뚝배기와 같은 맛’,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선생의 이 말은 미술인들의 정신과 마음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크게 자리하여 왔다. 평론 활동을 하는 필자도 뚝배기와 같은 한국의 작가들을 찾아 왔지만 은근하고 진한 맛을 풍기는 작가를 만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60년대 이후부터 활동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많은 추상주의적 화가들은 한때 서구 현대미술의 대표주자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그들의 작품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서구의 추상 미술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정서와 정감을 풍기는 작품이나 작가는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한지를 캔버스에 붙인다거나 오방색을 사용하여 추상 작업을 하였다고 해서 우리의 정서나 감성이 배어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구상주의적 그림에서 한복이나 갓 혹은 초가집을 그린 것을 한국적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작가는 40여 년 동안 진지하게 추상작업을 하는 여성화가 이정지이다. 그녀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정직하면서도 우직하게 그림을 그려내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자신이 관심을 지닌 분야를 꾸준하게 파고들어가는 작가다운 강직한 힘을 지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작품에는 진정한 우리 한국의 추상성이 무엇인가를 추론해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주목된다. 이정지의 작품은 인간적인 멋이나 예술적인 맛뿐만 아니라 넉넉함까지 배어있으며 우리 한국적인 추상성이 깊게 숨 쉬고 있는 투박한 추상표현주의이다.

이처럼 그녀의 추상 작업은 마치 선조들이 빚은 질박한 토기를 가마에서 구워 내듯이 대단히 감성적이고 순간적이며 즉흥적이다. 한국적인 고대의 추상 작품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조들이 남긴 예술적 흔적이나 문화유산에 견주어보면 이정지의 작품 세계를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다.

이정지의 작품에는 마치 조선의 도공이 즉흥적인 감성을 투박한 그릇으로 담아내듯 그녀만이 감지할 수 있는 순간적이고 구수한 한국적 감수성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한자의 이미지를 마음에 담아 한국인만이 지닐 수 있는 미적 감각으로 이미지화 시키는 작업은 한국적인 독특함을 담고 있다.

▲ ‘동그라미-1218’
이정지가 추구해온 작업세계가 한국성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의도적이거나 계획적이지 않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흙을 빚는 도공의 손길에 한국의 숨결과 혼이 자연스레 담긴 것처럼 물감의 흔적 속에 우리만의 투박한 감성이 담겨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의 예술세계는 한국인으로서의 타고난 감성과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이정지는 물감에서 순간적으로 형성되는 즉흥성과 두께, 다시 말해 마티에르에 대단히 정성을 쏟는다. 그녀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줄곧 한 방향으로만 추상 작업을 해 왔으며 남들에 비해 물감을 많이 쓰는 편이다. 그녀는 마치 도공이 무의식적인 감각으로 흙을 빚는 것처럼 물감이 형성되는 시점과 흔적들을 직감과 육감으로 체득하였다.

자연의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것, 다시 말해 대지나 흙, 우주 등이 지니는 본성을 화폭에 담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중에 재료적인 측면에서 서양의 추상과는 다른 독특한 기법을 자신만의 직감으로 체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의 추상 작업에는 시차 속에서 이루어지는 오묘하면서도 투박한 기법의 힘이 내재되어 있다.

그녀가 대지의 근원이나 흙의 본질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표현할 때면, 칠해진 색 밑에서 순간적으로 우러나오는 미묘한 색과 질감의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이 미묘한 느낌은 이정지만의 감성과 육감이라 할 수 있다.

▲ ‘동그라미-1123’
그녀는 40여 년 동안 부단히 한 방향으로만 작업하는 과정에서 색의 깊이와 물감의 농도 및 시간적인 차이와 적절한 순간 등을 육감적으로 터득하였고, 바로 여기에 한국적인 정서와 감흥이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마치 조선의 도공이 흙의 농도와 시간을 배합하기 위하여 땀 흘리듯 말이다.

대지나 흙의 본성을 찾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한국의 토양과 지극히 한국적인 문화적 소양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어떠한 것도 흉내 내지 않으려는 확고한 의지 속에서 이루어진 독창적인 작업행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정지의 작품을 보면 비록 형상이 드러나지는 않으나 무기교적임과 터프함 및 구수함 등이 잔잔히 흐른다. 그의 작업 속에 자연스럽게 담겨져 있는 한자의 형상은 우연적인 게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생성되고 생명을 이룬 경우로서, 그가 남긴 흔적들과 하나가 되어 우리 적인 감흥의 색다른 맛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한국의 자연이나 흙을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 우주 자연이라는 커다란 프레임에서 영감을 얻어내지 않나 싶다. 그러므로 구수한 큰 맛과 아울러 순백의 한복처럼 부드럽고 환상적이기에 신비감마저 느껴진다. 마치 영롱한 한국의 가을 하늘이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는 듯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작가 이정지만이 자아낼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이자 꿈의 세계이다. 그녀는 오늘도 이러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슴에 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다. 마치 조선의 도공이 투박한 질그릇 하나를 얻기 위하여 모든 정열을 땀으로 쏟듯이 말이다.

그녀는 한국의 자연을 사랑하고 이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자신의 예술세계에 담아내면서 선조들의 예술적 끼를 발산해내는 것 같다. 서예를 틈나는 대로 관조하는 그녀의 추상에는 다분히 한국적인 정서가 흐른다. 그녀의 작업실에는 물감이 묻은 추사선생의 책자가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 글 = 장준석(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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