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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탐방] 인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면 언덕, 언덕을 넘고 넘으면 계단, 계단을 오르면 좁은 골목길, 아이들은 좁은 골목을 운동장 삼아 축구를 하고 몇몇은 소꼽놀이를, 몇몇은 우울한 담벼락에 그림을 그린다. 이제는 재개발로 아파트가 서고, 달동네의 정겨운 풍경은 보기 힘들지만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가면 추억이 방울방울 피어나기도 한다는데...<편집자주>

가로등 켜진 조용한 골목을 열심히 쓸고 계시는 앞집 아줌마, 일찍부터 달동네 맨 꼭대기 집까지 우유배달 해주시는 아저씨, 등허리에 연탄을 멘 검게 그을린 아저씨의 하얀 치아, 가슴까지 뜨거워지는 저녁의 노을, 교회와 성당에서 울리는 영롱한 종소리가 가득한 달동네.

‘달동네’는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의미로 ‘달나라 천막촌’에서 비롯됐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중반에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이 정부가 정한 지역에서 천막을 치고 살아야만 했다.

그 방에 누우면 캄캄한 밤하늘, 달과 별이 모두 보였기에 달동네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달동에는 어려운 처지 속에서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 사랑, 정이 있지만, 이제는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져만 간다.

정겨운 그곳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는 것.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그 달동네의 삶을 되살리고자 2005년 10월 인천 동구 동현동 163번지 수도국산에 자리잡았다.

수도국산은 동인천역 뒤에 위치한 산인데, 개항기 이후 일본인들이 중구 전동 지역에 살게 되자 그곳에 살던 조선인들이 옮겨오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됐다고 전해진다.

이어 한국전쟁 때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산업화 시기에는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지방 사람들로 붐볐던 곳으로 전형적인 달동네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제는 수도국산에도 아파트와 공원이 들어차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수도국산달동네의 삶을 되살리고자 달동네 터에 박물관을 건립한 것이다.

1960~70년대 달동네 서민의 생활상을 테마로 연면적 약 999㎡에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구성돼 있는 제1종 근현대생활사전문박물관.

이곳은 인천의 달동네 가운데 역사와 유래가 깊은 수도국산 달동네의 삶과 일상을 중심 테마로 ‘수도국산 달동네란’, ‘달동네상점’, ‘여럿이 사용하는 공’, ‘달동네 생활상 엿보’, ‘달동네 삶의 편린들’, ‘수도국산 달동네 기념공간’ 등의 소주제로 나뉘어 구성돼 있다.

박물관에는 실존인물들이 소개되기도 한다.

우선 폐지수집가 맹태성씨. 그는 송림동에 살면서 1960년대 인천(조선)기계제작소(대우중공업 전신)에서 일했다. 퇴직 후 수문통 일대를 청소하고 송현동 주변 폐지를 주워 어려운 이웃을 도왔던 이다.

 

 

 


연탄가게 주인인 유완선씨는 수도국산 달동네가 사라질 때까지 지게로 연탄을 배달했던 사람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 달동네 사람들의 절반은 연탄으로 겨울을 나야 했는데 유완선씨는 연탄 25장을 등에 지고 언덕을 오르내렸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고 용인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은율솜틀집 주인 박길주 씨도 만날 수 있다.

1960년대 이전부터 동인천 구름다리에는 솜틀집이 모여있었는데 박길주씨도 ‘은율면업사’라는 이름의 솜틀집을 열었다.

박재화의 아들 박현석, 그 손자 박길주 씨에 이르기까지 2000년도까지 3대째 솜틀집을 운영했었고, 고인이 된 박길주 씨의 유언으로 솜틀기를 박물관에 기증했다.

대지이발관 주인 박정양 씨도 만날 수 있다. 1957년부터 이발관에서 일한 박정양 씨는 대지이발관에서 이발 기술을 처음 배웠다고 한다. 지금은 강화이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달동네 단골손님들의 머리를 단장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부지런히 일하고 더불어 살아온 달동네 사람들의 자취를 달동네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달동네의 살림집 모습을 통해 시대상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도시 저소득층의 집단 밀집 주거지’의 시초는 일제 강점기 ‘토막민촌’이라고 할 수 있다.

달동네도 그 중 한 형태인데, 일제의 식민정책, 8.15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인구가 급격하게 집중되고 주택이 부족하게 되자 빈민계층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발생된 것이다.

달동네는 산비탈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집들이 자리하면서 이뤄졌다.

또 좁고 비탈진 곳에 집을 짓다 보니 공간의 여유가 없는 반면 많은 기능을 담게 되었다.

더 나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 하면서 자기만의 공간을 창조해 냈다.

수도국산 달동네 가옥 형식은 1960년대 후반까지는 목조 흙벽에 초가지붕 혹은 루핑(유지)지붕이 일반 적이었지만 1970년대 전반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지붕은 기와지붕이나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 거쳤지만 달동네 주민들은 국가 소유의 땅을 무단 점거하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자주 철거되거나 집단 이주됐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고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떠날 수 없었던 이들….

그들의 치열하지만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달동네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달동네박물관은 귀한 유물이나, 값비싼 보석을 전시하는 곳은 아니다.

소중한 추억을 담은 곳이며, 이름없는 이들의 체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옛 자취는 사라지고 없지만 실존했던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다시 한번 그 달동네로 발걸음을 옮겨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향수를, 젊은이들에게는 지난 시대의 모습을 담아 돌아오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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