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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 '고광순'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광복회가 매달 선정하는 10월의 독립운동가에 1895년 광주의진에 참여하고 1906년 전남 창평에서 거의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고광순(1848~1907) 선생이 선정됐다.
1848년 2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고종후·고인후 3부자의 후예답게 가풍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정의정신이 투철했다고 전해진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48세였던 선생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곡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물리쳐 원수를 갚아야 한다"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기우만·기삼연 등 호남지방 유림들과 연락, 의병의 규합에 나서 호남의병 선봉에 섰다.
이후 1906년 6월 최익현 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이에 동참하려 했지만 최익현 등이 이미 진위대에 체포돼 해산됐다. 그러자 선생은 백낙구·기우만과 함께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군사를 모아 순천을 공략하려 했지만 군세가 미약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광무황제가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를 보냈고, 선생은 감격해 스스로 토적복수를 맹세했다. 이후 1907년 선생은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장정 5백여 명을 모아 담양에서 의진을 결성, 의병장이 되어 '호남의병의 선구자'로 명성을 날렸다.
1907년 10월 16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불원복(不遠復)'이라 쓴 태극기를 지리산에 세우고 항전했으나 일제군경에게 포위돼 공격을 받았다. 최후의 순간을 감지한 선생은 부하들에게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고 말하고 결사 항쟁하다 전사하였다.
정부는 지난 1962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이와 관련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고광순 선생에 대한 자료와 사진이 10월 한달 동안 독립기념관과 서대문 독립공원 역사관에서 전시된다.
이혜진기자 lhj@kg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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